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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정체성은 자신이 말하도록

‘탈북자 딱지 떼기’, 부모들이 만든 런던한겨레학교 교장이 된 뒤 수첩에 적은 말
등록 2021-05-17 00:15 수정 2021-05-19 08:34
영국 런던 한겨레학교 수업 장면. 장정훈 제공

영국 런던 한겨레학교 수업 장면. 장정훈 제공

내가 어쩌다 교장이 됐다. 전임 교장과 통화했다. 구체적인 업무 인수인계보다 지금까지 이 학교를 꾸려온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피고 듣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 같았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셨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붙은 ‘탈북자’ 딱지를 떼어주고 싶었어요. 부모가 탈북자지, 이 아이들은 아니잖아요.”

런던에 사는 노스코리안

우리 학교는 뉴몰든 한복판에 있다. 런던 남서부에 있는 뉴몰든은 영국과 유럽을 통틀어 ‘코리안’이 가장 많이 밀집해서 사는 곳이다. 이 일대에 사우스코리안(남한 사람)이 약 2만 명, 노스코리안(북한 사람)이 약 1천 명 거주한다고 한다.

뉴몰든에 북한 사람들이 살게 된 배경은 이렇다. 2000년대 후반, 영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하는 북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영국은 이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수용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북한 난민은 2006년 64명, 2007년 281명, 2008년 570명으로 한 해에 거의 200명씩 늘었다. 이들은 점차 한국어가 통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쉽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뉴몰든 지역으로 모였다. 영국에서는 5년 이상 거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북한 사람이 난민 지위에서 벗어나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가 되어 뉴몰든에 정착했다.

그들에게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자 한글 교육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인근 도시에 있는 한글학교로 아이들을 보냈다.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도 크고 시설도 훌륭한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에 가는 것이 어려운 아이들이 있었다. 수업료가 부담되는 가정도 있었고, 차로 20분 가야 하는 것도 차가 없는 집이나 토요일에 식당 일을 하는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 수준도 잘 맞지 않았다. 이 학교에선 한국 교과서로 수업했는데 아이들이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불편한 시선을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고민 끝에 뜻 맞는 부모들이 집 가까이에 마을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뉴몰든 한복판에 있는 교회를 토요일마다 빌려서 한글수업을 했다. 이렇게 해서 2016년 1월 ‘런던한겨레학교’가 만들어졌다.(이 사연은 2017년 11월26일 YTN 특별기획 <하나의 동포, 두 개의 한글학교>로 방송됐다.)

나는 부모들이 만든 이 마을학교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2018년 이 학교에서 잠깐 자원교사를 했다. 그곳은 부족한 게 많았지만 친밀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그런 학교를 맡게 되니 기쁘고 설레었다. 동시에 걱정도 됐다. 이 학교에 남한 사람이 교장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지레 겁났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라.”(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 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같은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는 있는데 자신은 없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으려면 내 신발부터 벗어야 하는데 그것부터 쉽지 않을 듯하다. 아이들에 대해, 학부모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탈북학생’

전임 교장과 통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 것은 경솔했다. “부모님이 북한 사람이면 자식도 북한 사람이 되는 거라면, 저도 북한 사람이에요. 저희 아버지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거든요. 전쟁 때 넘어오셨어요.” 의도는 순수했다. 나도 북한에 연고가 있다고 밝히고 그들의 커뮤니티 한 자락에 끼고 싶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탈북자라고 불리지는 않잖아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우리 아버지는 실향민이지, 탈북자가 아니다. 탈북자란 말에는 실향민에선 느낄 수 없는 온갖 정치적 메시지가 붙어 있다. “북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건 괜찮아요. 부모님이 북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북한에 가본 적도 없는 이 아이들한테 ‘탈북’학생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 했다.

한국에 있을 때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일했다. 교육부와 협력해서 탈북청소년들이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지원사업을 했다. 매년 탈북학생 통계조사도 했다. 최근 자료를 찾아보니, 2019년 한국의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학생은 2531명이고, 이 중 북한에서 태어난 학생이 38.8%,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난 학생이 61.2%라고 한다. 열에 여섯은 북한에 가본 적도 없는데 그들을 ‘탈북’학생이라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조사한다. 부모가 탈북민이면 그 자녀는 어디서 태어났든 탈북청소년, 탈북학생이다.

어떤 집단에 임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불가피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정책을 세우려면 정책 대상의 명칭과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탈북민’ ‘탈북청소년’ 같은 이름도 생겼다. 그럼, 이 이름은 언제까지 필요할까?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이름으로 불려야 하나? 5년, 10년 아니면 영원히? 2016년 말 ‘탈북민 3만 명 시대’가 도래했다는 뉴스가 제법 많이 보도됐다. ‘통일부 “1962년 이후 탈북민 3만 명 기록”’(<중앙일보> 2016년 11월13일치)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3만 명은 50여 년 동안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의 누적 숫자다. 북한을 떠난 지 수십 년이 돼도 ‘탈북’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그렇다.

아이들에게 붙은 ‘탈북자’ 딱지를 떼주고 싶었다는 전임 교장의 말을 수첩에 적어뒀다. 나는 탈북자 딱지가 내 몸에 붙어본 적이 없기에 솔직히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 이 먼 영국 땅에서까지 도대체 그걸 누가, 왜, 어떤 방법으로 붙이는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렴풋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코리안’이라는 꽤 괜찮은 유산

인수인계가 끝나고 내 출발점이 생겼다. 우리 학교에선 학생들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오직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고 그걸 잘 찾아가도록 곁에서 응원할 것이다. 자신을 구성하는 ‘코리안’이란 특징이 꽤 괜찮은 유산이라는 것도 가르쳐줄 생각이다. 남과 북에서 성장한 어른들이 협력해서 분단의 그늘이 없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면 좋겠다. 신참 교장의 각오가 너무 비장하고 의욕이 과잉되면 ‘워워’ 말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건 선생님들께 미리 부탁해뒀다. 함께 차근차근 멀리 갈 거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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