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린아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6월부터 전면 등교를 시작했다. 이제 온라인수업은 안 한다. 2020년 3월 이후 등교 중지, 온라인수업, 블렌디드수업(온·오프라인 혼합 수업) 등 어수선하게 보내다가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갔다. 1년하고도 2개월이 걸렸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자리에 상처가 크다. 영국에선 그동안 452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12만8천 명이 사망했다(2021년 6월9일 기준). 2020년의 사망자 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최대라고 한다.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2020년 3월, 록다운(도시 봉쇄)으로 학교 교육이 멈춘 때, ‘시험과 답’ 첫 번째 글을 썼다. 긴 터널 끝에 온 것 같은 지금, 마지막 글을 쓴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이 비상한 시대를 맞아, 뜻하지 않게 보고 알게 된 것이 많다. 크게 경험하고 배우는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세대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 이후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결국 이 경험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우리의 학습 능력에 달렸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드문드문 가는 통에 1년 넘게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곁에 있으면서 배운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 역량을 본 것은 놀라움이자 큰 수확이었다. 그들이 나를 가르쳤다.
영국에서는 록다운 중에도 필수노동자(Key Workers)의 자녀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부가 발표한 필수노동자는 방역 최전선에 있는 의료진은 물론 교육, 복지, 돌봄노동, 유통, 공공안전, 종교, 언론, 중앙·지방 정부, 교통, 통신, 우편, 식료품·필수품 생산 및 판매 종사자 등 광범위했다. 이들은 재난의 시대에 온몸으로 사회를 지탱해줬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의료진을 비롯한 이 필수노동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저녁 8시가 되면 집 밖에 나와 함께 박수를 쳤다. 우리 골목이, 이웃 마을이, 전국 방방곡곡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이런 집단행동에 심히 감동한다. 인류애가 마구 솟아났다. 박수 소리에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세계 평화가 올 것 같았다.
박수 지지는 몇 달 동안 계속됐다. 아이들은 점점 시큰둥해졌다. “노동조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사회가 이들에게 진정 감사하면 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매겨줘야지. 국회의원 연봉은 8만파운드(약 1억2천만원)가 넘는데 간호사 연봉은 2만5천파운드(약 3700만원)야. 누가 더 사회에 기여할까? 아마존 배달노동자는 일주일에 평균 400파운드(약 60만원)를 번대. 근데 그 돈을 벌려면 하루에 택배상자 300개는 배달해야 해. 아마존은 팬데믹 상황에서 천문학적 이익을 내고 있어. 필수노동은 배달노동자가 하고 돈은 회사가 벌지. 이런 것을 고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내 박수는 이 말에 무색해졌다. 아이들은 사회정의에 민감하고,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뚫는다.
교육 청원하고 국회의원에게 전자우편 보내고그래서 찾아봤다. 돌봄이나 배달 등에서 일하는 필수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조금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었다. 돌봄노동자는 대부분 ‘0시간계약’(Zero-hour Contract)에 묶인 시간제 노동자였다. (0시간계약은 직원을 시간제로 채용하면서 노동시간은 보장하지 않는 고용계약이다. 물론 일하지 않으면 임금도 없다. 고용주는 ‘유연한 노동’이라 쓰고, 노동자는 ‘족쇄’ 혹은 ‘착취’라고 읽는 비정한 제도다.) 박수치기에 감동하던 나는 이제 돌봄노동자의 생활임금을 보장하라는 청원에 서명한다.
‘정치적이 되라’(Be political)는 표어는 2020년 여름 ‘흑인들의 삶도 소중하다’(BLM) 집회에 참석하려고 각자 팻말을 만들 때 린아가 선택한 구호였다. 궁금해서 물었다. “너한테 정치는 뭐야?” “모든 사람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제도를 만들고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거지.” 또 질문했다. “‘정치적이 되라’는 건 무슨 뜻이야?” 나는 ‘정치적’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가 생각난다. ‘정치적인 사람’도 싫다. 린아의 대답은 달랐다. “잘못된 제도를 바꾸는 행동에 참여하고, 사회를 위해 제대로 된 제도와 법을 만들도록 그 권한을 가진 사람들을 압박하고, 논쟁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과 토론해서 설득해나가고, 뭐 그 밖에도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거지.”
이 말을 듣고 보니, 린아는 지난 1년 동안 이런 정치적 행위를 부지런히 했다. BLM 시위에 나갔고, 시위 뒤 젊은이들이 조직한 청원에 서명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인종주의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영국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침탈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청원했다. 잘못된 것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는 행동이었다. 정치인을 압박하는 일도 했다. 2021년 봄 보수당에서 집회와 시위에 대해 경찰의 제재 권한을 강화하는 법률을 발의하자,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법안 투표에 반대하라는 전자우편을 보냈다. “전자우편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국회의원의 전자우편 주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공공정보야. 당연히 공개해야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타인에게 설득하는 일도 끊임없이 했다. 린아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정치적 실천으로 시작한 완전채식(비거니즘)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쳐서 지금은 큰딸 애린이도 나도 린아 친구들도 다 비건이 됐다. 각자 자기 논리를 가지고 선택한 일이지만, 처음에 린아가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아시아의 여러 향신료를 기막히게 써서 훌륭한 비건 음식을 만들어 소개한 것도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아이는 정치를 어디서 배웠을까?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많은 정보를 얻고, 여러 온라인 자료를 보며 스스로 교육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앞으로 정치나 사회운동을 하겠다는 지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 주변에는 이런 친구가 많다. 다들 비슷하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세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내 세대보다) 이들에게 더 믿음이 간다.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자꾸 배울 기회를 모색한다. 배우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팬데믹 초기에 나는, 미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도래’하는 건지 궁금했다. 학자들의 예측을 듣다보면 어느 날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상)가 도래해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이 모여서 미래가 될 거다. 각자의 오늘을 응원한다.
이스트본(영국)=글·사진 이향규 <후아유> 저자
*이번 호로 ‘이향규의 시험과 답’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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