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사위가 여자, 며느리가 남자이길 바랍니다.” 누군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그 말은 맥락상, 당신이 그렇게 ‘동성애를 옹호’하니 당신에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길 바란다는 ‘악담’이었다. 내가 쓴 글은 성소수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맥락에서 영국의 ‘평등법’(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설명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동성애 옹호’를 찾아내다니, 그 민감함이 놀라웠다.
아이들에게 그 댓글을 보여줬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참 만에 막내 린아의 남자친구가 물었다. “이건, 당신의 아이가 언젠가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요?”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맞다. 사귄다고 다 사위, 며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뜻을 파악한 큰아이 애린이 말했다. “그게 어때서?” 린아가 말했다. “그게 다른 사람이 상관할 문제인가?”
50대 이성애자 여성인 나는 성소수자에 대해 잘 몰랐다.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무지했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라는 말도 잘 몰랐다.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준 이는 우리 딸들이다. 빨리 배운 편은 아니다.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했고, 여러 번 적절치 않은 표현을 해서 핀잔을 들었다.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나는 생소해서 처음에는 엄청 헤맸다.
몇 년 전에 린아가 온라인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16살의 A는 트랜스젠더 남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출생시 생물학적 성은 여자인데, 자신은 남자였다. “그럼 수술을 했어?” “엄마, 트랜스젠더 가운데 수술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야. 그건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들고 위험하거든.”
영어의 인칭대명사에는 성별 구분이 있다. 나는 영어로 말할 때 종종 그(he)와 그녀(she)를 바꿔 말하는 실수를 한다. 이건 아주 기초적 문법이지만, 한국어에 없는 것이라 입에 잘 배지 않는다. A를 지칭하면서 그녀(she)라고 말한 건, 절반은 습관적 실수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트랜스젠더를 어떤 성별로 불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A를 그녀(she)라고 할 때마다 린아가 말했다. “그(he).” “미안, 근데 트랜스젠더는 뭐라고 불러야 해?” “간단해. 트랜스남자는 ‘그’고, 트랜스여자는 ‘그녀’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거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이름을 불러.” 이 설명을 들으니 인칭대명사에서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한국어가 훨씬 성평등적인 것 같았다. 애린이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한국어에는 언니, 오빠, 누나, 형이 있잖아. 내 성정체성까지 밝히는 거지.”
방학을 맞아 A가 린아를 만나러 영국에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자리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고심했다. “남자인데 방을 같이 써도 될까?” “걱정하지 마, A는 게이거든.”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는데, 나는 이걸 이해하는 데 몇 초 걸렸다. “….” “걔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러면 여자로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남자로서 남자를 좋아하는 거구나.” “그렇지. 근데 그냥 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돼.” “A 부모님도 이걸 아셔?” “응, 근데 이해를 못해. 미주리주 시골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사이가 안 좋아. A가 힘들어해.”
차별받는 소수자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부모 처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이나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을 ‘정확히’ 알기에 16살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LGBT+ 이슈가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그 영향으로 (심하게 말하면 유행 따라) ‘성급하게’ 자신을 규정해버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이성애자 남녀밖에 없다고 (혹은 그게 정상이라고) 알고 평생 살았고,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이게 다 청소년에게 ‘동성애를 조장’하는 성소수자 운동 탓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이나 성적지향은 남이 ‘조장’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유행이라서 선택하는 것은 더욱 아니지. 차별받을 게 뻔한데 그걸 왜 일부러 ‘선택’하겠어?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거야. 어릴 때는 어렴풋이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분명히 알게 되는 거지. 이걸 선택 가능한 취향의 문제처럼 쉽게 이야기하면 절대 안 돼. 이건 절박함의 문제라고.” 아이들은 이 절박함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성소수자로 사는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쉽지 않다. 한국에서 사는 건 특별히 어려울 거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나를 싫어하는 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나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제6차 세계가치조사, 2010~2014’에서 한국 사람의 77.6%는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4개국의 평균값은 29.1%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펴냄, 김승섭 지음, 2017) 재인용.) 최근 발표된 ‘2020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도 ‘동성애자와는 친구, 이웃, 동료 등 어떤 관계로도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이 57%였다. 대체 왜 그럴까?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아니, 정작 동성애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본 적은 있을까?
우리 옆집에는 레즈비언 부부와 초등학생 딸 둘이 산다. 부부 사이가 좋고 아이들이 밝다. 아이들은 부부를 ‘아빠, 엄마’라고 부른다.(동성커플 자녀는 둘 다 아빠 혹은 둘 다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 가족의 특이한 점은… 곰곰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다른 건강한 가정과 비슷하다. 화목해 보인다. 그 집 아빠는 간호사인데, 우리가 아플 때 밤늦게 찾아와서 여러 가지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고마웠다. 그 집 엄마는 김치를 좋아해서 내가 가끔 갖다준다. 휴가 갈 때 집을 오래 비우면 집 열쇠를 서로 맡겨놓는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가까이 산다는 건 큰 복이다. 동성애자라고 그들과 이웃이 되지 않는 것, 상상할 수가 없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글에 달린 뜬금없는 댓글에 대한 내 입장은 이렇다. 나는 우리 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트랜스젠더든, 젠더퀴어의 어떤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든 정말 상관없다. 단지 그 사람이 친절하고 따뜻하고 유연한 사람이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 딸들의 사람 보는 안목에 달린 문제다. 아이들의 안목을 믿는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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