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가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막내 린아가 타이(동갑내기 남자친구)와 함께 볼 거라며, 관심 있으면 같이 보자고 했다. 물론 관심 있다. 블랙핑크는 린아와 타이가 사랑하는 뮤지션이다. 나는 그 전에는 큰 관심이 없다가 일전에 아이들이 보여준 뮤직비디오를 다 섭렵한 뒤, 팬이 되었다. 이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들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독특하고 세련됐다. 자랑스러움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을 보면, 팬심을 넘어 자꾸 딸 가진 엄마의 마음이 되기 때문일 거다. 오늘도 다큐멘터리 막판에 눈물이 났다. 각고의 노력과 성장이 애틋하고 대견해서 그랬다.
문제점에 집중하니 답이 안 보인다.
교육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여러모로 괴로운 과제였다. 하필이면 칼럼 제목이 ‘시험과 답’이라, 시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답을 모르겠고, 한편에서는 이 글쓰기 자체가 시험인 듯해 답안 작성하는 악몽을 며칠 꾸기도 했다. 자꾸 한국 교육의 ‘문제점’이 먼저 떠오르는데 그건 다 아는 얘기다. 과열 경쟁, 입시교육, 선다형 시험, 계층에 따른 교육 불평등, 학력별 소득 격차 같은 문제는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다루지 못할 바에야 피로감만 가중한다. 교육 문제라지만 따지고 보면 교육 분야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입시 경쟁도 근본적으로는 고용시장, 직업 지위, 직종별 임금 격차 같은 사회경제 구조와 얽혀 있다.
훈수랍시고 외국 사례를 소개하는 것도, 워낙 사회문화적 맥락이 달라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가 경험한 영국 교육이 우리가 가는 ‘방향’을 점검하고 새 시도를 하는 ‘상상력’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두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 여기도 나름의 다른 교육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 문제가 우리 것보다 더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다.
무력감을 떨쳐보려고 관점을 바꿨다. 우리 교육의 ‘좋은 점’을 찾기로 했다. 어린아이라도 자꾸 잘못만 지적하면 기가 죽는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자기가 가진 장점도 잊어버린다. 누구나 아는 문제에는 일단 눈감고, 좋은 점, 우리가 잘하는 것, 칭찬할 만한 것을 찾아보자. 질문이 바뀌면 새로운 답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두 세계 교육의 경험자이자 관찰자인 우리 식구들에게 물어봤다.
기본적으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
남편은(영국인이다) 한국 대학에서 20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좋은 점이야 아주 많지. 한국 학생들은 뭐든 열심이야. 성실함이 완전 몸에 밴 것 같아. 근로윤리(Work Ethic)는 세계 최고일걸? 전반적으로 능력도 뛰어나. 외국어도 잘해. 영어에 자신 없어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영어를 읽고 쓸 수 있어. 교양도 풍부해.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아. 순발력, 문제해결력, 창의력도 탁월하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신속히 해결해. 그리고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도덕적이었어. 기본적으로 옳은 일을 하려고 해. 그게 한국 교육의 결과라면, 거긴 분명 훌륭한 점이 있다고 봐.”
한국에서 6년, 영국에서 4년을 공부한 린아의 대답은 이랬다. “한국 학생들의 강점은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회복력(Resilience)이 아닐까? 여기 애들은 그런 힘이 부족한 것 같아. 멘털도 약하고 벌써 약물중독된 애들도 있어. 나는 경쟁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목표나 방향을 제시해주잖아. 그게 없으면 사람들은 길을 잃고 무력해지는 것 같거든. 여긴 그런 애가 많아.” 한국 학생들의 강점이 레질리언스(‘회복탄력성’이라고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라고 말하자, 괜히 내가 칭찬받는 기분이 들었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던 옛날이 생각나서였나.
내친김에 하나 더 물었다. 혹시 한국 교육과 관련해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 큰딸 애린이 말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고3이다.) “나는 내 친구들이 외국에서도 일할 기회가 많으면 좋겠어. 어차피 한국 안에서는 좋은 대학도, 괜찮은 직업도 희소하니까 그렇게 경쟁이 치열한 거잖아. 그 안에서 그렇게 경쟁하게 하지 말고, 차라리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정보도 주고, 네트워크 연결도 해주고, 계획서를 내면 지원금도 주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 애니메이션 업계만 해도, 한국인이 없으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우리 실력이 좋거든.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일할 수 있게 격려하고 도와주면 좋지 않을까?”
맞다. 젊은이들을 팔팔 끓는 냄비에 가둬두지 말고 차라리 냄비 뚜껑을 열어주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 사회 불평등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교육은 학생들이 그걸 박차고 구조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K교육’ 받은 학생들의 무대
블랙핑크 다큐멘터리를 봐서일까? K팝과 한국 교육이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서양 언론이 K팝 그룹을 소속사에서 찍어낸 상품쯤으로 치부할 때가 있었다. 영리하게 짜맞춘 멤버 구성,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긴 얼굴, 화려한 칼군무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처럼 폄하됐다. 훈련 과정도 도마 위에 올랐다. 사생활을 포기하고 먹고 자는 기본 욕구조차 통제된 채 몇 년 동안이나 진행하는 훈련, 경쟁 시스템, 착취 구조 문제가 폭로됐다. 그때는 나도 덩달아서 비판했는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연예산업의 착취 구조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제다. (물론 남들도 잘못한다고 우리 안의 문제를 덮자는 건 아니다.) 영리하게 기획된 밴드는 서양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K팝을 꼬집어서 비판하는 건,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갖는 우월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장르를 ‘예술의 한 형태’로, 이들을 ‘아티스트’로 인정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비판에 가장 상처 입은 이는 그 순간에도 땀 흘려 연습하던 젊은 아티스트들이었을 거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육의 ‘문제점’만 자꾸 얘기하면 정작 그걸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힘이 빠질 것 같다.
비판과 역경을 딛고 K팝이 지금 경지에 올라간 것은, 그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의 결과다. 일찌감치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 그에 맞춰 준비한 회사의 기획력도 도움이 되었다. 한국 학생들도 열심히 노력한다. 그 성실함과 능력은 세상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 그걸 세상에서 펼칠 출구를 찾아주자. 누구나 방탄소년단(BTS)이나 블랙핑크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맞는 크고 작은 무대에 설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 K교육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이 세상 어딘가 분명 있을 거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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