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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 없이 꿈꾸고 사랑하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의사 이덕요

남편 한위건 만나러 중국 망명했다 병에 걸려 세상 떠나
등록 2019-04-19 01:28 수정 2020-05-02 19:29
이덕요

이덕요

그 사람 이름이 처음 신문에 난 것은 17살 때였다. 1914년 식민지 조선에서 유일하게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 지방판에서였다. 함흥자혜의원 간호원 이덕요(李德耀)를 칭찬하는, 함흥지국에서 보낸 기사였다. 그에 따르면 이덕요는 함흥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진학한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도 우등으로 마쳤다. 인성이 어질고 얌전하며 행동이 단아하고, 일본어에 능숙하며 환자 간호에 헌신한 까닭에 칭찬 여론이 자자하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신문지국을 찾아와 이 갸륵한 미담을 보도해달라는 퇴원 환자들도 있었다. 병든 사람을 지극히 돌보는 간호원에게 감복한 이들이었다.

의학 공부하러 일본 유학 떠난 간호원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 각 도에 하나씩 만든 총독부 직영 병원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진료기관이자 지방의 일반 개업의를 관리하는 감독기관이었고, 간호원을 양성하는 의학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즈음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의 교육 기간은 1년6개월로, 한 해 간호원 20명을 양성했다.

미담의 주인공 이덕요가 평생 간호원의 길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더 많은 교육을 받는 길을 택했다. 경성으로 가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진학한 곳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였다. 1900년 설립된 이 학교는 11년간의 선행 수업 연한을 요구하는 3년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소학교 6년, 고등여학교 5년을 이수한 여학생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이덕요는 입학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본국의 학제와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업 연한은 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4년으로 모두 합해 8년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수업 연한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예비학교에 다니거나 예과 과정을 이수했을 것이다.

그 학교에는 조선인 여성 유학생이 여럿 있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개업의이자 이광수의 부인으로 유명한 허영숙은 그의 7년 선배였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여자 의사 정자영, 현덕신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2년 선배로 송복신·박정 등이 있었고, 1년 선배로는 한소제·길정희, 여성운동 지도자로 유명한 유영준 등이 있었다.

이덕요는 학업에 성심성의껏 임했다. 뒷날에 쓴 회상기를 보면, “학교 시대에 어떻게나 공부에만 명심을 했던지 도쿄 생활 6년간에 우에노공원, 히비야공원을 졸업할 때야 비로소 처음 구경했다”고 한다. 그처럼 열심히 공부한 것은 내면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후부터는 여자도 경제적으로 꼭 독립하여야 하겠다는 각성으로” 그러했다고 한다.

유학 중에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 이듬해인 1920년에는 도쿄 여자유학생 단체인 조선여자학흥회에 참여해 집행부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애도 했다. 고향이 자기와 같은 함흥이고, 큰 키에 너털웃음을 잘 치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생 주종건과 한때 연인 사이였다. 주종건은 명철하고, 좌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말 잘하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 재능이 이덕요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 른다.

1924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덕요는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 조선의 최대 병원인 총독부의원에서 내과·소아과·산부인과 진료를 맡았고, 나중에 개인병원도 열었다. 1928년 인천에서 성실병원을, 1930년에는 경성 낙원동에서 동양부인병원을 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여의사로서 확고한 사회적 명성을 쌓았다. 일간신문 지면에는 ‘여의사 이덕요’ 명의로 질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기고문이 빈번히 실렸다. 홍역, 종두, 백일해, 자궁병, 신경병, 소아감기, 성홍열 등의 질병을 다뤘다. 그뿐인가. 새해가 될 때마다 신문사들이 앞다퉈 여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돼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함께

그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문필과 단체활동으로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남녀평등과 여성 인권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고, 남존여비와 조혼을 반대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혼의 자유를 강조했다. 의가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혼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행위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한다. “우리 여성은 이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굳게 모이라!”고 외쳤다.

이덕요는 미모가 출중했다. 언론인이자 극작가인 이서구는 그와 대면했던 일을 이렇게 떠올렸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최서해가 입원했을 때,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가 이덕요를 만났다고 한다. “호박색 윤이 흐르는 그 흰 살결, 불그레 타오르는 입술, 어디까지든지 정열적인 그 눈, 먹장 같은 머리” 등 어디로 보아도 참 ‘절색’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자기 가슴이 꽉 막히더라고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교양과 이지와 총명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그리스의 비너스 여신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윤백남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덕요를 가리켜 대표적인 조선 미인이라고 평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감시 대상자로 지목했다. 경찰의 비밀 정보문서를 보면, 이덕요는 ‘공산주의자’로 쓰여 있었다. 이 관찰은 실제에 부합했다. 그가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형적이 뚜렷하다. 두루 알다시피 근우회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 여성들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통일전선 단체였다. 이덕요는 1927년 4월 발기인 모임을 할 때부터 사회주의 몫으로 거기에 참여했다. 그해 5월27일 창립총회에도 참가했으며, 그 자리에서 회의장의 정숙과 질서를 유지하는 ‘사찰’ 역할을 했다. 주세죽, 강정희 등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들과 함께였다. 그는 집행부에도 진출했다.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집행부에서 그의 역할은 ‘정치부’ 책임자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근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정치연구반을 열었다.

근우회에 대한 헌신은 오래 계속됐다. 창립 4년차인 1930년에도 근우회 경성지회에 참여했음이 확인된다. 그해 2월에 이덕요는 집행위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담당 부서는 정치문화부였다. 근우회 여성 회원들의 정치적 각성과 의식 수준을 높이는 일을 줄곧 해온 것이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지어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들여다보자. 그에 따르면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 합법 언론매체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지어서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

일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의 후신인 도쿄여자의과대학 정문(위). 이덕요가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근우회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 회의장. 단상에 의장과 서기 2명이 있다. 참석 회원이 80명, 남녀 방청객이 300명이었다.

일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의 후신인 도쿄여자의과대학 정문(위). 이덕요가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근우회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 회의장. 단상에 의장과 서기 2명이 있다. 참석 회원이 80명, 남녀 방청객이 300명이었다.

사랑하며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봤지만

그의 배우자도 사회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최고 이론가라고 일컫는 유명한 한위건이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1925년 가을에 결혼했다. 아내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총독부의원 의사로, 남편은 기자로 일할 때였다. 한위건은 합법적으로는 언론인 신분이었지만,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도 깊숙이 관련돼 있었다. 결혼한 지 두 해 뒤인 1927년에는 합법·비합법 양쪽에서 공히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정치부장으로 정치면 기사 작성을 책임졌으며, 비합법 공간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전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금실은 매우 좋았다. 조그만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부부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요는 결혼생활에 대해 짤막한 수필을 남겼다. 그는 이성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 연후에야 사람은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볼 수 있다고 썼다. 한위건과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남녀에게 권했다. 주저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라고.

그러나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8년 3월 남편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이라는 대대적인 탄압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위건은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했다. 당 기관지 의 발간을 주도하면서 맹렬히 필봉을 휘날렸다.

이덕요는 외로웠다. 의사가 직업이니 여자 혼자 살면서도 생계를 걱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평화를 잃었노라고 고백했다. “H를 멀리 바다 밖으로 보내고 벌써 3년째나 고독한 생활을 해오는” 중인데, “나에게는 그분을 사모하는 생각이 점점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별 3년차 되던 1931년 1월, 신문에 실린 신년 소감문에서 뭔가를 결단했음을 암시했다. 거친 파도를 헤쳐서 저 앞에 가로놓인 큰 바다를 건너가고 싶다고 했다. 작은 배라도 한 척 얻어서 건너가고 싶다고 썼다. 설혹 그 배가 모진 파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도 헤엄쳐서 저 바다를 건너가고야 말겠다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해 5월이었다. 이덕요는 마침내 망명을 결행했다. 행선지는 중국 베이징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남편을 찾아서 출국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의 정보문서를 보면, 베이징에 있는 그의 주소는 “북평(北平) 신문내(新門內) 순성가(順城街) 여명보공(黎明補公)중학교 내”였다. 남편을 따라간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 동지들의 견해로는 “이덕요는 그곳에 가서도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한위건과 나란히 반일 혁명운동에 참여하려고 이덕요가 망명했다고 이해했다.

남편과 반일 혁명운동은 해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이덕요의 망명 생활은 길지 못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얼마 안 돼 몸져눕고 말았다. 몹쓸 병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귀국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박문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덕요의 마지막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부군 한위건은 지금까지도 사별한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참고 문헌
1. ‘지방매일, 함경남도 함흥’, , 1914년 5월9일치.
2. 최은경,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의사들의 활동’, , 80, 291쪽, 2016년 8월.
3. 이덕요, ‘인습 타파가 목전의 문제’, , 1927년 7월 2일치.
4. ‘현대 장안호걸 찾는 좌담회’, , 1935년 11월호 87~88쪽.
5.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第11312号, 槿友會執行委員會ノ件’,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7년 10월 5일.
6. 한위건씨 부인 李素山,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생활상 일대 轉機’, , 4, 89쪽, 1927년 2월.
7. ‘어떠한 결심과 어떠한 희망으로써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나?’, , 1931년 1월3일치.
8. 觀相者, ‘사랑이 잡아간 여인상’, , 57, 40쪽, 1932년 11월.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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