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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은 범죄다

역사 왜곡 처벌만이 근본적 처방
등록 2019-02-23 05:24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정연아, 정연아!” 아들 묘비에 손을 얹고 그렇게 섧게 통곡하던 백발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 지난해 참석했던 38주년 5·18 추념식에서였다.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 당했던 것.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 이 묘비명은 아들의 일기였다. 당시 전남대 2년생. 도청을 사수하다 생을 다한 그 아들의 이름은 이정연 열사. 비가 내렸다. 어머니의 통곡은 길었고, 광주5·18 묘역을 휘감다가 가슴을 찢고 내리꽂혔다. 곳곳에서 밖으로 혹은 안으로 오열을 누르는 어머니들을 만났다. 별빛 같던 청춘들이 인간의 존엄과 진실을 구하고자 단 한 번뿐인 생을 던졌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금남로 전야제에서 만났던 소복의 오월 어머니들을 다시 묘역에서 만났다.

거기서 제주4·3의 어머니들이 겹쳐졌다. 자식이 눈앞에서 죽고,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오지 않는 남편을 수십 년간 기다리던 그들을. 늙어서도 부모형제 그리워 통곡하던 그들을.

어머니들은 아직도 운다

광주5·18과 제주4·3에 대한 망언은 많이도 닮았다. 요즘 용암처럼 정쟁화된 5·18 망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왜 역사적 사실로 규정되고, 국가추념일로 지정되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교육현장에서 배우는 아이들의 눈과 귀까지 어이없게 만드는가. 상식을 뒤엎는 망언은 어째서 반복되는 것일까, 기막힌 일이다. 과거사에 대한 거짓뉴스는 잊을 만하면 망언으로 유족들의 가슴을 자꾸 찢어놓는다.

왜 우리는 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부끄러운 행태를 자꾸 대면해야 하는가. 우리는 개인의 명예훼손 앞에서는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 비해 집단적인 명예훼손에는 다른 의견이라고 치부하면서 지나치게 관대했다. 가령 5·18 항쟁에 대한 ‘북한개입설’이나 제주4·3평화공원을 ‘폭도공원’으로 매도한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그 어떤 처벌도 하지 못했다. 오랜 진실 규명 끝에 이룩한 5·18과 4·3은 이미 국가 차원에서 평가된 역사적 진실이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역사 왜곡에 대해 “국회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자기부정”이며 “우리 민주화 역사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겠는가.

이젠 그야말로 역사 왜곡 처벌만이 근본적 처방이다. 최근 한 조사에서도 역사왜곡 처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 의견이 필요 없다는 의견보다 두 배가량 높게 나왔다. 4·3과 5·18 망언을 놓고 수년 전부터 이 한국판 홀로코스트법 제정 논의들이 오갔다.

“법이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왜곡하고,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것에 대응하는 최종 방편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법적인 보호는 대중에 대한 거짓으로 수모를 당한 자들이 의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직한 기억을 하는 데 필수 조건입니다.” 2년 전 5·18 역사 왜곡 토론회에 참석했던 독일 훔볼트대학 토마스 잔트퀼러 교수의 말이다.

정직한 기억의 조건

이 법의 근본은 타인의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범죄에 있었다. 1994년 이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던 독일은 이 법을 어기면 최고 5년 징역형, 이 법을 도입한 오스트리아는 최고 20년형에 처할 수 있게 했다.

촛불정권이 과거사 청산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친일파 문제부터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정리엔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언제 일본의 역사 왜곡에 강도 높은 사죄를 요청해봤던가. 어떻게 국회의원들의 망언조차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면서 3·1운동 100주년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겠는가.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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