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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또 변하지 않겠지

젊은 죽음의 ‘미시감’ 정부와 국회의 ‘기시감’
등록 2018-12-22 13:12 수정 2020-05-03 04:29
김봉규 선임기자

김봉규 선임기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오은 ‘미시감’ 중)

‘기시감’의 반대인 ‘미시감’은 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심리학 용어다. 12월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24)씨의 어머니와 12월18일 강원도 강릉 펜션에서 사망한 서울 대성고 고3 학생 3명의 유족에게 한국 사회는 낯설기만 하다. 장성한 아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끝낸 아이들이 여행을 갔을 뿐인데 모두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런 법이 어딨냐”고 물었지만, 한국 사회는 답한다. 같은 발전소에서 일하더라도 위험한 업무는 하청업체에서 하는 것이라고, ‘2인 1조 근무’는 말 그대로 원칙일 뿐이라고, 사고가 나더라도 발전소는 돌려야 하니 현장을 말끔히 치우는 것이라고, 보일러 배관 문제로 가스가 누출돼 일산화탄소 중독이 될 수도 있다고, 가스누출탐지기는 설치 안 할 수도 있다고, 농어촌 민박 내부 보일러 점검은 민간 책임이라고…. 남겨진 이들의 몸과 마음이, 억장이 무너졌다. 폭삭.

하지만 끔찍한 사고 뒤 정부와 국회가 보이는 반응은 이미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2016년 5월 19살 김아무개군이 서울 구의역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기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여 숨진 뒤, 국회는 산업재해 예방 법안을 앞다퉈 발의했지만 법안은 노동시간 단축 등 다른 이슈에 묻히고 경영계 반발에 밀려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2년7개월이 지난 12월19일 국회는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원을 열고 부랴부랴 법안 논의를 시작했다. 여야 책임 공방 끝에 12월27일 산업안전보건 전면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같은 날 열린 정부와 여당의 당정은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 제도를 개선해 하청업체의 산업재해 현황을 평가에 반영하고, 발전 5개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통합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해 지원하는 대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강릉 펜션 사고 뒤에야 ‘외양간’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안전 점검이 취약했던 농어촌 민박의 관리를 강화하고, 가스누출탐지기 설치 의무화 등 개선 대책을 내놨다. 교육부는 12월19일 각 시도 교육청에 “교외 체험학습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2014년 2월 부산외국어대 학생 10명이 숨진 경북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사건 뒤 “행사를 자제해달라”고 한 것과 판박이다. 숙박 안전시설 점검이 먼저지 체험학습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비판이 어김없이 나왔다.

현대 과학과 심리학은 미시감과 기시감 모두 ‘인간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착각에 빠진 것일까. 분명한 건 4년 전 4월 황망한 사고에 한 시인이 내뱉은 탄식이 이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노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슬픔은 장마처럼 지나가고 아, 세상은 또 변하지 않을 것이다.”(백무산 ‘스물두 살 박지영 선장!’)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블라블라/ 한국서부발전


라오스와 김용균


김봉규 선임기자

김봉규 선임기자

2018년 7월23일 라오스 주민 27명이 물에 휩쓸려 사망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도 130여 명에 이르렀다. 주민 800여 명 중 3분의 2가 실종된 마을도 있었다. 20일에 대피령이 있었다지만 실제 대피가 시작된 건 물이 들이닥치기 2시간 전이었다. 우기였고 언제나 그렇듯 세피안강이 범람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대피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물이 목까지 차올랐고 5~8m까지 물이 찼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린 물 위에서 아이와 함께 배에서 하룻낮 하룻밤을 보낸 아버지도 있었고, 물에 휩쓸리는 와중에 손을 놓쳐버린 아이 생각에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도 있었다.
건설 중인 세피안-세남노이댐의 보조댐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일어난 변괴였다. 문제의 보조댐은 흙과 모래로 만들어진 사력댐이었다. 관계자들은 낙차와 유량이 많은 댐에 콘크리트가 아닌 모래를 썼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이 공사를 맡은 것은 SK건설(출자 비율 26%)이었고, 운영은 한국서부발전(25%)이 했다. 라오스 댐 건설에 한국 기업이 주도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나머지는 타이 기업(RATCH·25%), 라오스 국영기업(LHSE·24%)이 ‘전기 판매’를 맡아 출자했다. 1조원이 들어간 이 사업에는 박근혜 정부의 돈도 1천억원 가까이 들어간 것으로 보도됐다.
사고 뒤 SK건설은 우기의 갑작스러운 비로 인한 재난이라 했고, 한국서부발전의 김병숙 사장은 국회 업무보고에서 20일 댐의 침하가 발견됐다며 부실 공사로 인한 재난이라고 서로 ‘네 탓’을 했다. SK건설은 댐 붕괴 당일 ‘최첨단 공법으로 공기 단축까지 이뤄낸 SK건설의 업적’이라는 홍보성 기사도 내보냈고, ‘하청 단가 후려치기’ 자료가 나오기도 했다. 댐 건설의 배후에 비용 절감을 위해 하청을 후려치고 안전을 무시하는 한국 경제의 ‘안전 불감’과 ‘태만’이 응축돼 있었다. 그리고 12월12일 한국서부발전 산하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김용균씨가 연료 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 한국서부발전은 2001년 한국전력공사를 다섯 지역으로 나눠 민영화할 때 만들어진 회사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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