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이다.
1923년 5월1일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열며 방정환 선생은 ‘아동권리 공약 3장’을 선포했다. 이 공약에는 ‘완벽한 인격적 대우를 허하라’ ‘만 14살 이하 어린이들의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라’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만한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라’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는 1924년 국제연맹이 ‘아동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을 채택하기 1년 전에 선포됐다. 1923년이라는 한국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어린이, 청소년의 권익 보호를 위한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하지만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예멘 여성 마리얌(28·가명)의 셋째 아이(2)는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만한 시설’에 갈 수 없는 형편이다.
취업활동만 허가된 인도적 체류자이 8월23일 만난 마리얌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난민이다. 마리얌과 남편(37)은 2015년 말레이시아를 거쳐 2016년 한국에 들어와, 2017년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난민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예멘 내 인권 상황 등을 고려해 체류를 허가받은 것이다.
예멘에서 태어난 첫째 딸(5)과 둘째 딸(4), 한국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도 각각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부모를 따라 자녀들도 인도적 체류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현행 난민법에 규정된 난민인정자의 처우는 9가지다. 사회보장, 기초생활보장, 교육보장, 사회적응교육, 학력인정, 자격인정, 배우자 등의 입국 허가 등이다. 이에 비해 인도적 체류자에게 허가된 것은 취업활동뿐이다. 그 자녀에게 보장된 법적 권리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1994년부터 2017년까지 18살 미만 난민신청자는 1332명이다. 이 가운데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아동과 청소년은 355명(25.1%)에 그쳤다. 0∼4살은 135명(10.1%), 5∼17살은 200명(15%)이다.
마리얌은 임신 초기 입덧이 심해 2주에 한 번꼴로 산부인과를 다녀야 했다. 직장·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마리얌은 병원 문턱을 넘을 때마다 진료비가 20만원 넘게 나왔다. 취업활동만 허가받은 인도적 체류자는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고 입덧이 가라앉아도 돈이 문제였다. 산부인과 병·의원들에서는 출산이 임박한 마리얌에게 출산비 200만∼300만원을 불렀다. “남편 월급이 150만∼200만원이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5만원을 내고 아이들을 키우려면 200만원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다.” 다행히 외부 단체의 지원을 받고서야 마리얌은 셋째 아이를 순산할 수 있었다.
난민인정자 임산부가 지역·직장 건강보험 가입자나 피부양자인 경우 임신을 확진받은 뒤 임신·출산 진료비 지원을 신청하면 임신 1차례당 50만원 상당의 전자 바우처(복지서비스)를 받는 것과 대조적인 처우였다.
건강보험 피부양자로도 인정 못 받아건강권 사각지대에 있는 자녀들의 크고 작은 병치레는 가족 생존권까지 위협했다. 올해 초 큰아이 등에 피부병이 생겨 병원에 갔다가 약값만 12만원 넘게 들었다. 셋째아이도 폐렴과 장염 등으로 응급실을 왔다 갔다 했다. 두세 달 사이 병원비는 남편 월급을 크게 웃돌았다.
마리얌은 무력해졌다. 자녀들이 아픈데도 제때 치료할 돈이 없었다. 마리얌은 “당시 우울증이 심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한국어가 서툴러 의사가 뭐라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휴대전화 번역기를 사이에 놓고 아이가 왜 아픈지 더듬더듬 이해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지난해부터 공장에 다닌 남편은 직장건강보험 적용을 받았다. 다달이 건강보험료도 냈다. 하지만 최근까지 마리얌과 자녀들은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은 직장 가입자의 배우자, 직계존속, 직계비속, 형제자매까지 피부양자 적용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인정해주는 가족관계등록부는 6개월 이내에 발급받은 서류였다. 예멘을 떠나 3년이 지난 이들에게 6개월 이내에 발급받은 가족관계등록부가 있을 리 없었다. 가족관계등록부를 다시 발급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리얌이 갖고 있던 서류들은 한국의 행정 체계상 휴지나 마찬가지였다.
자녀들은 DNA 검사를 받고서야 남편과의 생물학적 관계를 입증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외부 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족관계등록부로도 생물학적으로도 부부 관계를 입증할 수 없었던 마리얌은 피부양자 대상에서 끝내 제외됐다.
이호택 국제난민지원 기독교자원활동모임인 ‘피난처’ 대표는 과 한 통화에서 “난민인정자는 국민과 동일하게 건강보험 보장을 받지만,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며 “부모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 병원비가 부담돼 자녀 치료를 포기하는 일까지 생겨난다. 질병에 취약한 어린이가 제때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건강보험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리얌은 첫째와 둘째를 보육시설에 보내기 위해 어린이집도 ‘삼고초려’해야 했다. 한국 정착 초기 마리얌 혼자서 집 근처 어린이집들을 찾아다녔다. 어린이집 보육료는 35만원이나 됐다. 첫째와 둘째를 모두 보내면 70만원이 든다.
난민인정자의 경우 만 0∼5살 어린이집을 이용하면 보육료(만 3살 종일반 기준 월 22만원)를,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이용하지 않아도 양육수당을 받을 수 있다. 인도적 체류자인 마리얌은 보육·양육 지원을 받지 못해 보육료 부담이 배로 커졌다.
마리얌은 한국인 집주인과 함께 어린이집을 다시 찾았다. 마리얌은 “보육료를 조금만 깎아달라”며 어린이집에 호소했다. 다행히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어린이집이 보육료를 조금 낮춰줬다. 하지만 셋째가 만 3살이 되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지 마리얌은 자신이 없다.
마리얌은 “어린이집에서 사정을 봐주고 아이들을 잘 돌봐줘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친구도 사귀고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 문화에도 익숙해져 너무 기쁘다”면서도 “외부 단체의 보육비 지원이 끊기면 셋째까지 무사히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월 10만원 아동수당도 못 받아9월부터 만 6살 미만의 어린이에게 월 10만원씩 아동수당이 처음 지급된다. 어린이의 기본 권리와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조처다. 하지만 아동수당 역시 인도적 체류자 자녀는 해당되지 않는다. 난민 인정 어린이만 예외적으로 인정했다.
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활동가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국에서 장기 체류가 불가피한 난민 어린이는 보육 시설에서 가정에서 배우기 어려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육시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어린이집 보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를 불가피하게 가정에서만 양육하는 난민도 있다.”
그나마 현행 국가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과정을 밟는 데는 비교적 제약이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학교장이 난민 어린이 입학을 거절하는 경우 이에 대처하기는 어렵다. 실제 2015년 인천 중구 영종도 난민지원시설에 입소한 난민 신청 아동 10여 명이 인근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해 시설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공립 다문화학교에 다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난민 자녀가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적응할수록 부모와의 언어·문화적 단절이 빨라진다는 점이다. 빠르게 한국어를 익히는 어린 자녀와 달리 부모들은 한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탓이다.
박정형 활동가는 “난민 어린이의 한국어 교육만큼이나 부모의 한국어 교육이 중요하다. 또 자녀에게는 부모의 모국어 교육도 매우 중요하다”며 “난민 어린이의 사회 적응에 부모와의 소통이 중요하지만 언어 교육이 주로 결혼이주자에게 이뤄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마리얌도 한국어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다.
마리얌은 최근 첫째의 어린이집 물놀이 준비물을 챙겼다. 그런데 수영복 입은 아이들 가운데 자기 아이만 평상복 차림이었다. 아이가 준비물을 한국말로 거듭 읽어줬지만 마리얌이 간신히 알아들은 단어는 신발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얌은 어린이집에서 찍어준 단체 사진을 보고서야 아이에게 수영복을 챙겨주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휴대전화 번역기를 쓰는데, 아이들이 클수록 나와 거리감을 느낄까봐 벌써 걱정이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도 사실상 무국적한국에서 태어난 셋째 아이는 현재 여권이 없다. 병원에서 발급해준 출생증명서가 유일하게 신분을 증명해주는 서류다. 현행 국적법은 부모 국적에 따라 시민권을 준다.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부모가 예멘 국적이면 아이도 국내 예멘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에는 예멘대사관이 없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대사관이 일본에 있다.
아이들 옷 살 돈도 빠듯해 헌 옷을 사 입히는 마리얌에게 일본은 이웃 나라가 아닌 먼 나라였다. 결국 셋째는 일본에서도, 예멘에서도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한국에는 외국인등록이 돼 있지만 예멘에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사실상 ‘무국적’ 상태다. 많은 난민 어린이가 출생신고로 국적 취득이나 확인 절차를 거치지 못한 채 사실상 무국적자로 보육·의료 등 기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지만, 정확한 실태 파악이 안 되고 있다.
2012년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의 이행 여부를 감독하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의 제15·16차 정부보고서를 검토하면서 “난민, 난민신청자, 무국적자의 자녀를 위한 적절한 출생등록제도가 없는 상황에 대해 특별한 우려”를 표명하고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난민, 인도적 체류 자격자, 난민신청자의 자녀와 미등록 이주자 자녀의 출생이 제대로 등록될 수 있도록 제도와 절차를 수립하라”고 권고했다.
그 뒤 7년이 지났다. 여전히 아동권 보장은 제자리걸음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권고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은 대한민국에 주재하는 해당국 대사관을 통해 할 수 있다”며 보편적 출생등록 권고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마리얌은 지난해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이의신청서를 냈다. 그는 “한국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의신청 결정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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