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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밥 먹는 기쁨

등록 2018-01-06 15:24 수정 2020-05-02 19: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한글로 ‘떡국’이라 적는다. 삐뚤삐뚤 온 힘으로 밀듯 연필로 쓴다. 자이니치 1세들의 생을 채록하기 위해 얼마 전 찾은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사랑방 ‘우리서당’에서였다. 얇은 공책이 뚫릴 것 같다. 이분은 누구신가. 놀랍게도 102살 할머니. 귀는 멀어도 일본말과 섞으며 큰 소리로 “내 고향은 성산포” 그러신다. 대부분 80대 이상 할머니 스무 명 남짓 모여 함께 점심을 먹은 뒤 글공부도 하고 여가도 즐긴다. 몸은 불편해 뵈지만 표정들은 아이 같다. 이 할머니들을 돕는 정귀미씨가 이사장이자 운전 도우미까지 하며 모임을 끌어가고 있었다. 모두 구불구불 인생의 아리랑 골짜기를 돌아온 노년들. 대부분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이다.

몸이 녹듯 마음이 풀리니

인근 비영리단체 법인이 운영하는 재일동포 놀이방에서도 노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 함께 밥을 먹는다. 그들에게 오는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밥을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지.” 마침 일본 초등학교 아이들이 놀이방을 방문했다. 아이들 20여 명이 각자 하나씩 질문지를 들고 왔다. “할머니, 일본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운 말은 뭐예요?” “제일 맛있는 일본 음식은요?”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들은 아이들의 질문을 큰 소리로 되물은 뒤 다시 큰 소리로 답한다. 아이들이 현장학습으로 문화를 배우는 시간이다.

내가 제주 출신 할머니에게 물었다. “생각나는 고향 음식 있나요?” “‘자리젓’은 생각만 해도 좋아.” 그리고 묻는다. “국(몸국) 알아?” 이러신다. “국은 해조류인 모자반에 돼지 접짝뼈를 푹 우려 국물을 낸 국으로, 제주 대표 보양식이다.” 어떤 맛이냐고 물어보라. 대개 “베지근한 맛”이라고 말한다. 뭔지 모를 기름기 자르르 나는 감칠맛을 제주어는 이렇게 표현한다. “늙으니 고향 것이 더 그립네.” 할머니의 눈매가 젖어 있었다. 어딘들, 누군들, 고향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 음식처럼 푸근한 기억이 있을까. 음식을 서로 나눌 때 몸이 녹듯 마음이 풀리니 말이다.

“이라는 오래전에 나온 영화, 너도 알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을 식구들과 먹노라니 정말 기분이 좋아지더라. 하기야 식구라는 말도 ‘밥을 함께하는 입들’이고 보면. 위로와 힘을 얻어.” 서울에서 오래 타향살이를 하던 친구가 보내온 전자우편에서 고향 음식을 좋아하던 친구의 식탐이 느껴졌다. 서로 수십 년간 불화로 반목해온 마을 사람들이 하루 저녁 성찬을 먹으며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온 증오의 벽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영화. 복권에 당첨된 돈을 성찬을 위해 다 쓴 여인, 바베트의 만찬. 음식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일으키고, 정을 일으킨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며 혼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다. 가속화하는 고령화 속에 하나둘 가족이 떠나고 홀로 된 노년들이다. 홀로 먹지 않고 어찌 견디겠는가. 어쩔 수 없는 밥상이다. 그렇기에 이 땅의 노인복지회관은 시골로 갈수록 정겹다. 함께 점심 먹고 즐기는 시간이 가장 큰 기쁨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 속에 잠시라도 함께 밥 먹는 시간을 기다리는 노년이다. 그럼에도, 이런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 노년이 더 많다.

남자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일본에서 제주로 온 복지 전공 교수와 이야기할 때였다. 그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왜 그렇게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할머니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럼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랑방 같은 곳을 차지한 것도 대개 할머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장수한다는 요인도 있지만, 이 또한 노년복지 시책의 숙제다.

노년은 어떤 청춘들에게도 곧 밀어닥칠 문제다. 새해는 더불어 밥 먹는 기쁨을 나누고, 더불어 시간을 쪼개 함께 말을 들어주는 시간이 많았으면 한다. 고향 ‘떡국’을 그리워하던 자이니치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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