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길윤형 편집장으로부터 영국인 관점에서 본 겨울올림픽에 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든데, 그 이유는 솔직히 말해 영국은 겨울 스포츠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분명 스케이트를 잘 타는 친구가 있었고, 우리는 컬링도 곧잘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른 나라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4년부터 시작된 겨울올림픽을 거꾸로 헤아려봤을 때, 영국은 지금까지 겨울올림픽 금메달을 딱 10개 따냈을 뿐이다. 영국은 근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1908년, 1948년, 2012년까지 수도 런던에서 세 번의 여름올림픽을 열었다. 그러나 겨울올림픽을 연 적은 한 번도 없다. 결정적으로, 비가 올 땐 스키를 탈 수 없다.(영국은 시시때때로 내리는 소나기로 유명한 나라다)
‘스키 낙하 선수’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겨울 스포츠 선수는 마이클 에디 에드워즈다. 한국 독자들은 별명이 곧바로 제목이 된 영화 를 통해서 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에 70m, 90m 스키점프 두 경기에 출전했다. 결과는 꼴지였다. 그의 실력이 너무 볼품없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스키점프 선수’(ski jumper)가 아니라 ‘스키 낙하 선수’(ski dropper)라 조롱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 스키점프 선수들은 그들의 사랑스러운 종목을 웃음거리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따돌리기도 했다.
심각한 국내 경쟁자 기근으로 ‘독수리 에디’는 영국의 스키점프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당연히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자격도 있다. 이후 에디와 같은 선수가 국가대표 자격을 확보하는 상황을 막고자 올림픽 출전 자격 기준이 강화됐다. 진정한 올림픽 선수에겐 아마추어 정신이 있어야 하지만, 서투른 사람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에도(어쩌면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에디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됐다. 영국인들은 타고난 승자보다 불가능에 맞서는 도전자를, 위대한 승리보다 영광스러운 실패를 사랑한다.
영국인들만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을 응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의 본성이다. 다만 중요한 지점은 한국인이 스스로를 ‘정 문화’와 연결 짓는 것처럼 영국은 스스로를 ‘약자 응원’과 연결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영국 사람들은 종종 약자에 대한 사랑을 영국의 핵심 정서라고 말한다. 2017년 7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자를 지지하는 것이 영국의 국가적 특징을 정의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여덟 번째로 선호되는 항목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른 항목들로는 차를 마시는 문화, 빈정댐,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등이 포함됐다.
2년 전, 모든 영국인들은 창단한 뒤 오랫동안 하위 리그를 전전하던, 창단 13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기를 간절히 원했다.(실제로 레스터 시티는 2015∼16년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을 거뒀다) 2016년 유러피언 챔피언십 리그에서 아이슬란드가 무디고 활기 없던 잉글랜드팀을 2 : 1로 이겼을 때, 많은 영국인은 아이슬란드와 함께 기뻐했다.
이런 영국인의 심리는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영국의 국가적 영향력과 힘은 수십 년 동안 점점 축소돼왔다. 언젠가는 영국이 ‘약소국’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브렉시트 혼란에도, 영국이 아직 혼돈의 한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런 상황과 무관하게 약자에 대한 영국의 사랑은 오래전부터 확립되어온 정서다. 또 우리는 우리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었을 때(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이었을 때)도 약자를 사랑했다.
기업, 인종, 국가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승자’ 집단은 그 자신의 영웅 서사와 건국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한 집단의 결속감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이 때문에 종종 일이 꼬이거나 과장되기도 쉽다. 근대 영국에서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덩케르트 정신(영국은 1940년 5월26일 프랑스 북서부의 덩케르트 해안에서 포위돼 섬멸될 위기의 영국군과 프랑스군 36만6162명을 탈출시켰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영국은 히틀러에 대항하는 고립된 섬이었다)과 관련이 깊다. 당시 영국은 히틀러에 대항해 외롭고 굳건하게 맞섰다. 이 역사적 기억이 ‘약자 정신’이라는 국민적 정서의 출발점이다. 이는 강자에 대항해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도덕적으로 명백하게 우월하다는 집단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영국 역사에서 영국이 무자비한 침략자였던 순간도 많다. 몇 년 전 유럽 식민 제국주의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KBS와 함께 인도, 자메이카 등 몇 나라를 방문했다. 나는 영국이 수년에 걸쳐 그들에게 저지른 침략의 골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인터뷰를 거치며 착취와 잔혹함을 담은 여러 사례를 듣고 또 듣게 됐다.
배우지 못했던 역사무엇보다 나를 실망시킨 것은 이 이야기들이 내가 학교에서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역사라는 점이다. 내가 배운 영국 역사는 어린 시절에는 고대 왕과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고, 이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북아일랜드와 벌인 내전이 전부였다. 내가 아편전쟁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19살 때였다. 지루했던 어느 날 대학 도서관에서 역사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그 책에서 나는 영국 군대와 한 사기업이 아편을 팔기 위해 한 국가를 침략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아이들이 이런 종류의 역사적 사건들을 조금도 배우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는 것은 비정상적인 ‘역사 세탁’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영국이 제국주의 시기에 권력과 부를 착취하기보다는 위대한 문명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배운다. 이에 따라 영국은 우리가 의로운 약자의 나라라는 모순되는 개념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독수리 에디’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가 매우 ‘영국적인’ 영웅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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