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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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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변태 폴’을 만들었나

여성을 향해 과도하게 성적으로 집착한 남자 선배…

‘우스운 인간’ 아닌 성범죄자로 인식했어야
등록 2018-03-06 17:48 수정 2020-05-03 04:28
여성단체 회원들이 3월1일 대검찰청 앞에서 검찰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여성단체 회원들이 3월1일 대검찰청 앞에서 검찰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며칠 전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 시절 사진을 꺼내 봤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어느 지루한 날, 이런 일이 벌어진다. 사진 속에는 여러 친근한 얼굴, 반쯤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그중에는 여전히 좋은 친구들도 있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단체 사진 속에 폴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알고 지냈다.

그는 습관적인 유들유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가 친구들에게 불리던 별명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곧 나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 몰려왔다. 그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그는 ‘변태 폴’(Paul the perv)이라고 불렸다. 자기보다 어린 여학생을 향한 스멀대는, 과도하게 집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 시절 ‘변태 폴’은 ‘저질’이라고 여겨졌지만 그것은 혐오보다는 조롱에 가까웠다. 우리는 반쯤 농담 투로 1학년 여학생들에게 그가 주변에 어슬렁대면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 여성을 목표로 정하면 단 한 가지 목적을 마음에 품고 ‘노’가 ‘예스’ 혹은 침묵으로 바뀔 때까지 그녀를 취하게 만들거나 추근댔다. 내 친구 중 하나는 결국 그와 하룻밤 자는 것으로 그 사태를 끝냈다. 비록 그녀는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웃고 말았지만 그녀는 분명 그날 밤 그를 자기 방에 들이고 싶지 않았을 거다.

20살의 내가 폴을 혐오가 아닌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대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변태 폴’을 성범죄자가 아니라 ‘우스운 인간’쯤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아마 당시 그와 같이 학교를 다녔던 수많은 여학생은 그를 떠올릴 때 ‘우스운 인간’이 아니라 ‘성범죄자’로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흔히 ‘남성다움’이라는 단어에는 남성은 조절할 수 없는 거대한 성적 욕망을 지닌 존재이며 여성은 거기에 굴복당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정복’(conquest)이라는 단어가 이런 때 주로 쓰인다. 여성을 설득해 섹스에 성공한 남성은 그녀를 ‘정복했다’고 쓴다. 여성의 욕망은 없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여긴다. 불행하게도 사회는 수천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사고하도록 우리를 사회화했다.

왜 우리는 1학년 여학생들에게 ‘조심하라’고 했을까? 가장 먼저 ‘변태 폴’에게 변태 짓을 멈추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남자가 그렇지, 뭐’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폴은 자신이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남성 모두가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비록 내가 폴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많은 폴을 만든 것은 아닐까?

나에게 떠오른 또 다른 생각은 폴이 ‘좌파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동성애 혐오, 인종주의, 또 젠더 불평등에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아마도 그 무렵 나와 그들은 폴이 가진 문제를 이해하기엔 너무 무지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두 명의 ‘진보적인 인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평등과 정의를 추상적인 단어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추상적이지 않은 실제 여성을 대할 때 그 단어를 잊는다. 이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행동이다.

‘미투 선언’은 한국, 영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나 응원받아야 한다. 미투 선언을 한 당사자들은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다. 고소·고발과온갖 루머가 떠돌 것이고, 공정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여성들이 그들에 대한 폭력적인 행동을 고발하는 것을 북돋우고, 남성들이 자신이 하는 일(또 하지 않는 일), 남녀 모두 함께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면 미투 선언의 최종 결과는 반드시 좋을 것이다.

다니엘 튜더 전 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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