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시동 걸린 ‘자기변호노트’ 도입

서울지방변호사 피의자 방어권 보장 토론회 열어…

인권위는 ‘메모할 권리’ 강조, 경찰도 도입 긍정적
등록 2017-09-26 17:50 수정 2020-05-03 04:28
지난 9월19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피의자 방어권 보장과 자기변호노트’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제공

지난 9월19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피의자 방어권 보장과 자기변호노트’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제공

<font color="#C21A1A">‘시민을 위한 법조 개혁’</font> 시리즈에서 보도한 ‘자기변호노트’ 도입 논의가 법조계에서 시작됐다. 9월19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5층 정의실에서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가 주관하고 서울지방변호사회(서울변회)가 주최한 ‘피의자 방어권 보장과 자기변호노트’ 토론회가 열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스스로를 방어할 거의 유일한 수단 </font></font>

이날 토론회에는 서울변회와 민변 등 변호사 단체뿐 아니라 경찰청,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서도 참석해 자기변호노트의 의의와 보완점 등을 활발히 논의했다. 특히 최준영 경찰청 수사제도개편단 총경은 이날 “자기변호노트의 도입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서울경찰청은 변호인 참여권 실질화를 ‘시범운영’ 하면서 변호인에게 신문 내용 기재를 허용하고 있다. 이를 허용하는데 피의자에게 신문 내용 기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말했다. 자기변호노트 도입과 관련해 예상외로 ‘쿨’하게 긍정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다만 최 총경은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돼 노트에 기재될 경우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든 문제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 경찰이 개혁의 일환으로 준비 중인) 진술녹화제도 확대와 진술녹음제 도입을 통해 강압 수사, 자백 강요를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토대 위에 자기변호노트 제도를 추가해 운영하면 취지가 더욱 빛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권보은 인권위 조사관도 노트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권위는 검찰 조사 중 누락 진술이 있으면 추가 진술하기 위해 메모를 하려고 했으나 제지당한 피의자의 진정을 받은 뒤 2011년 11월 검찰총장에 ‘피의자의 메모 행위를 허용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수사 현장에서 이같은 권고는 큰 효력이 없었다. 인권위는 비슷한 취지의 진정이 다시 들어와 2014년 2월 재차 검찰총장에 ‘조사 중 메모를 허용하라’는 권고를 해야 했다.

경찰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받던 피의자가 병원 영수증 뒷면에 메모하려 볼펜을 꺼내다 경찰관에게 “메모하면 절대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피의자는 2015년 5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결국 그해 12월 해당 경찰서장에게 ‘소속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피의자 신문 과정 때 메모 행위를 허용하도록 관련 직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여전히 검경 수사 과정에서 메모가 허용되는 일은 드물다. 권 조사관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수사 초기 단계에서 피의자가 메모하는 것은 스스로를 변호하고 방어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며 “자기변호노트 같은 도구가 잘 활용된다면 피의자가 잘못된 수사 관행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고, 수사기관이 공정한 수사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지는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때 피의자 먼 산을 보며” </font></font>

국선변호사 등으로 일하며 1천 명 넘는 형사사건 피의자를 변호해온 법무법인 위민의 조수진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의 방어권 침해 사례를 발표했다. 조 변호사는 자신과 피의자가 경험한 부당한 수사 사례로 호통치기, 모욕적 언사, 물건 던지기 등을 들었다. 또 여러 명의 수사관이 한 명의 피의자를 두고 “당신 진술이 말이 되냐” “누가 믿어줄 것 같냐?”라며 몰아가거나, “괘씸죄에 걸릴 수 있다” “본인에게 유리한 게 뭔지 잘 생각해보라”며 허위 자백을 유도하는 사례도 직접 보거나 들었다. 조 변호사는 “조서에 피의자의 행동에 대한 묘사를 연극대본 지문처럼 넣어서 재판부가 의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사례도 많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피의자가 조사 중에 별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조서에 ‘(이때 피의자 어금니를 꽉 물며) 아닙니다.’ ‘(이때 피의자 먼 산을 보며) 아니라니까요.’ ‘(이때 피의자 긴 한숨을 쉬며 말이 없다)’ 등 필요 없는 내용을 적어넣는 것이다.

일반 형사사건에서 조서의 힘은 상당히 크다. 법원은 재판에 제출되는 증거와 법정 진술을 중심으로 판결을 내린다는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판사와 법정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재판으로 피고인이 무죄를 다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조서를 중심으로 재판이 이뤄지곤 한다. 특히 검찰 피의자 신문 조서는 별다른 절차적·형식적 문제가 없다면 피의자가 법정에서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조 변호사는 이같은 한국 증거법의 특성 때문에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불러 진술 방향을 유도하고 조서를 꾸미는 일에 힘을 집중하게 된다”며 “피의자 방어권을 보장하려면 장기적으로 조서 제도를 폐지 내지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법 개정이 필요한 일이다. 반면 자기변호노트는 당장 시행이 가능하다. 조 변호사는 “조서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기변호노트가 도입돼야 한다. 피의자가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사기관이 이를 의식해 강압 수사를 하지 못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자기변호노트는 시민이 수사기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끈’이다.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자기변호노트 보완 필요성도 </font></font>

이날 토론회에서 공개된 ‘자기변호노트’ 초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정영훈 서울변회 인권이사는 자기변호노트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더 간단명료하게 작성되면 좋겠고, 장애인·외국인 등이 활용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피의자가 메모할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부서 등을 검찰과 경찰 조직 내에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