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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와 남성 카르텔

등록 2017-06-15 17:1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근사한 신문기자가 꿈이었다 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몸을 던진 민주투사였고,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 1980년대로 건너던 길 위에 그 여자가 있었다. 고은 시인의 에도 등장했던 공순이 대학생, 그 이름, 천영초. 수치와 모욕으로 범벅된 감옥생활, 이후 굽이치던 삶, 그도 모자라 후일 남의 나라에서 불의의 사고로 실명하고 상당 부분 기억을 잃어버린 채 돌아온 여자. 시대는 그를 잊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그러한 길 위에서 터졌다.

그녀의 대학 후배이자 제주 올레 개척자이기도 한 제주 여자 서명숙. 그녀가 를 통해 그 시절을 복원해냈다. 유장했다. 대학 시절 한때 영초언니와 살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함께 구금의 시간을 살아낸 그녀가 아프게 건넜던 청춘의 바다, 거기에 다시 몸을 적시며 쓴 책. 며칠 전, 그 출간을 축하하는 조촐한 자리에서였다. 저자와 저자의 벗들이 제주도 서귀포에서 서울의 영초언니를 휴대전화로 만났다. “감옥에 있을 때야. 슬프고 외로웠어.” 낭랑한 목소리.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돌아온 그녀의 대답이었다.

프랑스 남녀 동수 내각, 우리는 아직…

사람들은 잊는다. 피 토하듯 재봉틀을 돌리던 시절을 살아낸 그들의 시대를. 헌신하던 그들의 시린 시대가 다음 여성의 시대를 열었음을. 시대는 잊는다. 민주의 뒷모습에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세대, 꿈보다 민주화의 문을 열라고 외치던 영초언니들이 있었음을. 차별의 벽 앞에서 소리치던 이들이 있었음을. 이 혁명의 시대는 저 문 밖의 그녀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이 땅에도 여성 각료 시대가 펼쳐졌다. “성평등은 모든 평등의 출발이며, 인권의 핵심 가치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성평등 슬로건. 여성계가 술렁인다. 초대 내각에서 여성을 30% 채우겠다고 했으니. 참 공교롭다. 앞서 프랑스의 젊은 새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국방부 장관에 여성을 임명했다. 남녀 동수 내각 22명 중 11명. 세상은 이렇게 변했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새 정부 여성 각료 발탁 주목한다

우리는 어떤가? 아직 멀어 뵌다. 무엇보다 뼛속 깊은 남성 중심의, 감성 없는 정치권 의식이 문제다. 돌아보라. 능력 있는 여성을 내정하면 불을 켠다. 한 사람의 경력자는 보이지 않는 벽을 견뎌낸 오늘이다. 근데도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의 노심초사 모습도 보인다. 그들끼리의 카르텔이 깨질 게 두려운 것은 아닌가. “경력 좋고 흠결 없는 여자를 찾기 어렵다. 학벌과 능력이 출중하지만 경력에서 검증이 안 된다”고 우려한다. 경력? 여성의 경력을 차단한 이들은 누구인가. 경력은 자꾸 발탁해야 쌓인다. 고위직 문을 열어줘야 다음 문이 열린다. 하위직에서는 공직 사회의 큰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출산·육아 외에 사회활동 경력을 쌓는 여성들의 경우, 그것은 ‘전쟁’이다.

모든 최초의 문은 어렵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단연 이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였다. 그녀가 그랬다. “보따리장사 하다가 학교에 자리잡으려 할 때 교수가 되지 못했다. 많은 여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더욱 헌신할 결의가 생긴다고.

입으로만 “양성평등”. 여성 비하 발언을 일삼다 정치의 계절에만 수그리는 제복의 정치인들 의식이 문제다. 여성의 잣대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한 벽을 깨는 일은 만만치 않다고 한 여성학자는 말한다.

지금 여성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증기를 빼주는 일, 새 정부는 가능할까? 아직도 많이 남은 여성 각료의 발탁을 주목하는 이유다.

“한국과 일본, 중국을 둘러보면서 아직 남성 사회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검은 제복’을 차려입는 직종은 대개 남성 차지인 듯합니다. 이런 권력을 지닌 자리에 여성이 더 많이 진출한다면 전쟁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최근 서울의 한 토론회에서 던진 말이다.

허영선 시인·제주 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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