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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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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대신 빛을 허하라!

부채 연구자이자 채무 당사자인 천주희씨

“학자금 대출의 ‘지긋지긋한 사슬’에서 청년들 벗어나게 할 대안으로 기본소득 찬성”
등록 2016-10-29 15:21 수정 2020-05-03 04:28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질까?
‘우리’를 향한 질문은 ‘나’로부터 출발했다.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11년 동안 낸 등록금은 5천여만원. 그 가운데 2200만원은 학자금 대출로 마련했다. 학자금 대출자 100만 명, 대출액 12조원의 시대다. 학생 채무자이자 연구자인 ‘나’는 질문의 답을 찾고자 25명을 만나 ‘대학교와 빚’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석사 논문(연세대 문화학과)을 쓰고 이어 책까지 펴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도 2200만원 학자금 대출 채무자</font></font>
최근 출간된 (사이행성 펴냄)의 저자 천주희(30)씨 이야기다. 책 뒷부분에서 그는 학생을 채무자로 만드는 사회에서 벗어날 5가지 제언을 내놨다. 그중 하나가 ‘대학(원)생과 청년 세대에게 기본소득(사회적 배당금)을 지급하자’는 제안이다. 책은 ‘지금, 여기’ 청년들의 현실과 마음을 촘촘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책이자, 사람이기도 하다. ‘청년과 기본소득’을 눅진한 삶의 언어로, 때론 날카로운 학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인공이다.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font size="4">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지원서</font>

부채 연구자이자 학자금 대출 당사자이기도 한 천주희씨가 최근 펴낸 책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김진수 기자

부채 연구자이자 학자금 대출 당사자이기도 한 천주희씨가 최근 펴낸 책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김진수 기자

1) 이름 <font color="#006699">천주희</font>

2) 나이 <font color="#006699">만 30살</font>

3) 성별 <font color="#006699">여성</font>

4) 직업 <font color="#006699">사회적 협동조합 근무 중
(본인이 생각하는 직업은 연구자이자 예술가) </font>

5) 거주 지역 <font color="#006699">서울(자취 중)</font>

6)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font color="#006699"> 2005년 3월, 서울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교에 입학했다. 아니, 등록금을 내고 대학교에 들어오는 입장권을 샀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사회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일종의 (노동)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자 자격증이다.
첫 ‘입장권’은 다행히 빚내어 사진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적금통장을 내밀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손님이 없는 날에는 가끔 교문에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이걸로 대학을 가든, 장사를 하든 네 독립자금으로 쓰렴.” 통장에는 1천만원가량이 들어 있었다.
등록금과 생활비로 쓰고 나니, 1년 만에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였다. 결국 휴학을 했다. 평일에는 비정규직으로, 주말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았다. 1년 만에 1천만원을 모아 다시 복학했지만, 월세 보증금 500만원을 내고 나니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빚을 냈다. ‘당신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 투자하세요(대출받아서요).’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학자금 대출 안내문을 보고 340만원을 빌렸다. 조금씩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독립심과 경제관념이 남다른 편이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며 4남매를 키우셨다. 중학생 때부터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글쓰기를 잘해 인터넷신문 리포터로 활동하며 원고료도 받았다. 그 돈으로 을 정기구독하고, 방학 때면 여행을 다녔다. 대학에 와서도 그랬다. 집에 손 벌릴 형편도 아니었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빈곤이 독립을 위한 과정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갈수록 700만원, 1200만원 학자금 대출금은 차곡차곡 쌓였다.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전 재산이 1만원밖에 남지 않은 날도 있었다. 감기에 걸렸는데 병원비와 약값이 아까워 병원에 가지 않았고, 차비가 없어서 수업에 빠지는 날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2009년이다. 물벼락 때문이다. 난데없이 수해를 두 차례나 당했다. 어느 여름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동생이랑 자취하던 지하방에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다. 여기도 반지하였다. 추석 연휴가 끝난 어느 가을날, 고향에 갔다가 집에 돌아왔더니 냉장고가 다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200가구가 물에 잠겼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친구의 책과 내 책 600여 권, 생활용품이 다 쓰레기가 되었다. 남은 재산이라곤 입고 있던 옷과 휴대전화뿐이었다. 그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학자금 대출 이자가 연체됐다는 알림 문자였다.
2011년 또 다른 ‘입장권’을 샀다. 대학원에 입학했다. 학자금 대출이 1200만원에서 늘어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공부가 좋았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빚 독촉이 심해졌다. 농어촌 학자금 대출의 원금 상환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월 28만원씩 갚아나가야 했다.
한 학기 500만원에 이르는 등록금, 전공서적 구입비, 월세와 교통비 등에 허덕이면서 원금 상환까지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자칫하다간 신용유의자가 될 판이었다. 상환을 미뤄달라는 신청 서류를 준비했다. 집에 손 벌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처음으로 허물어뜨렸다. 어머니께 130만원을 빌렸다. 어머니가 마트에서 일해 받은 한 달치 월급이자, 가족들의 한 달치 생활비였다.
그 뒤로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연체→절약→일시 상환→빈곤은 대학원 내내 반복된 패턴이 되어버렸다. 대학원에서 한 학기 조교 하며 받는 돈은 250만원. 월 50만원씩 쪼개 쓰면, 그 가운데 20만원이 학자금 대출금을 갚는 데 쓰였다. 빚과 굶주림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학교에서 간혹 장학금을 받기도 했지만, 국가에서 받은 도움은 하나도 없었다.
학자금 대출이나 장학금을 신청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가난한 학생으로서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기 위해 “얼마나 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인지 증명”해야 하는 탓이다. 부모와 떨어져서 산 지 10년이 넘었어도, 마흔 살이 넘은 미혼의 대학원 선배들도 부모의 소득을 끊임없이 증빙하고 증명해야 했다. 복지라는 착한 가면을 쓴 금융상품인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2014년부터는 ‘골방’에 틀어박혀 본격적인 논문 작업에 몰두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숱하게 밤을 새우곤 했다. 살이 쭉쭉 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는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돈이 없으니 빨리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논문 제목은 ‘대학생은 어떻게 채무자가 되는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대학(원)생 25명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았다. 잘 쓰고 싶었다. 나의 문제이기도, 친구들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적어도 공부하는 사람을 빚진 자로 만드는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이며, 한국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로 가난하고 빚을 지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고 여겼다.
나는 ‘채무자’와 ‘부채 연구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면 논문 작성에 집중할 수 없는데, 생활비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월 40만~50만원은 필요했다. 어느 겨울날,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생활비 긴급지원 제도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득이 좀 없어서요.” 너무 힘들어서 국가한테라도 기대고 싶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대학원생인데요.” “부모님 계세요? 왜 젊은 사람이 돈 벌 생각을 안 해요?” 모멸감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한국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으로 8년 동안 생활하려면 기본 8천만원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대학에 가야 살길이 생긴다’ ‘빚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교육비는 바로 대학 졸업 뒤에 임금으로 환수되지 않는다. 저성장 사회에서는 대학을 나오더라도 일자리가 없고, 취업이 어려워 졸업과 취업 사이에 공백 기간이 길다. 취직을 하더라도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라) 그동안 투자한 교육비를 바로 회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학자금 부담을 개인과 가족에게만 떠넘길 뿐이다. 학자금 대출은 평생 따라다니는 ‘지긋지긋한 사슬’이 된다. 논문을 쓰면서 만난 연구 참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편찮으시지 않아서” 운이 좋다는 말이 굉장히 슬펐다. ‘반값 등록금’ 시위에 나갔다가 한번은 옆에 있는 친구가 “나도 돈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니고 싶다. 아르바이트 그만하고 싶다”고 외치는데,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나였기에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학자금 대출을 장려하는 대신 대학 교육을 국가가 책임진다면, 미래 노동을 위한 ‘투자재’가 아니라 좋아서 선택하는 ‘여가재’로 학위를 따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 그러려면 학생에게도 일종의 임금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기존 임금노동 개념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연구노동, 예술노동 등 새로운 노동 가치를 인정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임금을 ‘사회적 배당금’ 또는 ‘기본소득’으로 부르고 싶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난 4월부터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월급은 120만원 남짓. 여전히 1천만원 넘는 빚이 남아 있다.
나는 퇴근하고 나면 작가로 출근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수첩에 희곡을 쓰고, 집에서는 동화를 쓴다. 논문 쓰는 틈틈이 ‘탈출구’ 삼아 썼던 희곡 두 편을 무대에도 올렸다. 대학생이 아닌 청년 부채에 대한 후속 연구와 문화기획도 준비 중이다.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글도 마음껏 쓰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
왜 1순위가 빚 갚는 게 아니냐고? 내가 채무자인 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덕분이다. 올해는 월 10만원 안팎, 내년에는 월 30만원씩만 갚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빚을 직면할 수 있게 되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기본소득만으로 학생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확실치는 않다. 다만 확실한 건, 적어도 당장 생계비 때문에 굶거나 죽는 학생은 없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font>

의 서문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왜 ‘대학생과 빚’이라는 주제를 연구했는지 설명하려면, 가난과 상처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서다. 천주희씨는 자신을 빚에 허덕이는 채무자로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담담하게 이를 묘사하는 과정이 힘겨워 많이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혼자 틀어박혀 있는 그를 골방에서 꺼내준 건 ‘관계’였다. ‘이러다 정말 굶어 죽겠구나’ 싶어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 밥이라도 먹는 모임을 만들었다. 독립연구자, 농부, 재즈보컬리스트, 연극인 등이 뭉쳤다. 예술인집단 문화창작공간 ‘다락’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함께할수록 행복해진다</font></font>

얼마 전 출판기념회가 열린 날, ‘다락’ 친구들이 현수막을 들고 몰려왔다. ‘우리는 왜 너와 함께 할수록 행복해지는가’라고 적혀 있었다. 친구들은 ‘빚’ 말고 ‘여유’를 위해 쓰라며 10만원도 쥐어줬다. “일종의 기본소득이죠.”(웃음) 청년들이 자신의 권리와 쓸모를 익힐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확보하는 데 기본소득이 큰 보탬이 되리라고 천주희씨는 믿는다. 그는 책에 썼다. 우리에게 ‘빚’ 대신 ‘빛’을 허하라!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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