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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SOS 돌아온 답은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주인공 최일영씨가 원하는 기본소득
등록 2017-03-09 09:10 수정 2020-05-02 19:28
이렇게 취재했습니다
지난 2월1일 독자로부터 전자우편 한 통이 도착했다. 스스로 ‘저소득층 서민’이라고 밝힌 독자는 기본소득 논쟁을 다룬 기사(제1145호 신년기획 ‘이번 대선 최대 이슈는 기본소득’ 참조)를 읽었다며 “대선 주자들 목을 잡아끌고서라도 ‘전 국민 기본소득’으로 시행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사자 입장에서 간곡히,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드리는 부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은 이 독자를 만나기로 했다. 기본소득 의제를 가장 많이 다뤄온 매체로서 저소득층이 느끼는 기본소득이란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2월7일 기사의 주인공 최일영(35·가명)씨를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났다. 젊고 평범한 그가 갑작스레 생계의 어려움에 닥치게 된 과정과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하면서 느낀 모멸감에 대해 들었다. 그가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상담하는 과정을 한 차례 동행 취재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눈에 비친 정치권의 모습이 어떤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다. 특히 빈곤사회연대는 취재 전반에 대한 도움과 함께 기본소득이 도입됐을 때 이미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는 이들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에 대해 조언했다.
은 앞으로 최일영씨가 생계급여 수급 절차를 밟게 될 2개월간의 과정도 추적 취재할 계획이다.
취재 송채경화·황예랑 기자, 편집 김효실 기자, 디자인 장광석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에서 주인공 다니엘은 심장 수술 뒤 의사로부터 ‘일하면 안 된다’는 권고를 듣는다. 목수였던 그는 수술 뒤부터 생계가 막막해졌다. 보조금을 신청했지만 정부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그의 등을 떠민다. 그가 일할 수 있는 상황인지 조사하는 정부 조사원은 그에게 심장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만 던진다. “팔을 들어올릴 수 있나요?”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나요?”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심장에 대한 질문은 왜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조사원은 “주어진 질문에만 답하라”고 한다.

결국 다니엘은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돼 정부의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영국 정부는 그에게 이력서 쓰는 법을 알려주고 구직 활동을 하라고 강요한다. 그는 형식적으로 이력서를 써서 이곳저곳의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영혼 없는 구직 활동에 지쳐간다. 그러는 동안 생계 유지를 위해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가구를 포함해 집 안의 모든 집기를 내다 파는 지경에 이른다.

비인간적인 정부의 태도와 정부보다는 오히려 이웃들에게서 온정을 느끼는 상황을 담담하게 그린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선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정부의 복지 시스템이 세계인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몸이 아프니 가난이 찾아왔다
2월7일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최일영씨가 기초생활수급 신청 과정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2월7일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최일영씨가 기초생활수급 신청 과정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최일영(35·가명)씨는 허리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다. 디스크가 마모돼 뼈끼리 닿을 수도 있는 상태다. 오래 서 있지도,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한다. 수술을 하고 싶지만 수술 뒤 더 큰 부작용을 겪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수술 계획을 접었다. 무엇보다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다. 먹고사는 일조차 막막하기 때문이다. 한창 일할 나이이지만 최씨는 현재 어떤 일도 하기 힘들다.

최씨는 75살 아버지, 62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세 식구가 사는 집은 보증금 2천만원의 월세 60만원짜리 다세대주택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소득으로는 한 달 월세를 내기도 벅차다.

최씨네가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서울 4년제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부족함 없는 가정이었다. 지역에 부동산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최씨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편의점, 서빙, 막노동, 엑스트라까지 안 해본 것이 없다. 그러다 허리를 다쳤다. 육체노동을 접고 1년 동안 고시 공부에 열중했다. 그동안 허리는 점점 더 악화됐고 집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마지막으로 땅을 팔고 17평 월세방으로 옮긴 뒤에는 어머니가 생계를 도맡았다. 1년6개월 전 어머니는 일을 하다가 고관절을 다쳤다. 할 수 없이 어머니도 일을 접었다.

그나마 있던 재산은 그동안의 생계를 유지하느라 모두 썼다. 이제는 최씨가 일해야 세 식구가 먹고살 수 있다. 그러나 최씨는 허리 통증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잠시 국가에 의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정도만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쉬면서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허리도 많이 좋아질 거라고 여겼다.

두 달 전 최씨는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상담원은 최씨가 기초생활수급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부양의무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최씨에게는 형이 있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지난해에는 조카가 태어났다. 평범한 회사원인 형과 형수는 1년에 한두 번 연락할까 말까 한 사이다. 형은 부모님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부모님이 좁은 집으로 옮긴 것에 대해서는 ‘세 식구가 살기에 굳이 큰 집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형네 가족의 벌이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동생과 부모님까지 부양하기에는 버거울 터다. 부모님은 “죽더라도 혼자 죽으련다. 첫째한테는 절대 손 못 벌린다”고 했다. 최씨의 생각도 같다. 그동안 살갑게 지내지 않은 형에게 이제 와서 세 식구의 생계를 떠맡길 수는 없다.

최씨는 집을 나오기로 했다. 법적으로 최씨의 형은 부모, 그리고 부모와 함께 사는 동생까지 한 가구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최씨가 부모와 가구를 분리하면 형 때문에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자녀에겐 부모 부양 의무는 있지만 형제 부양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집을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행법상 65살 이하 국민이 생계급여를 받으려면 ‘근로능력평가’에서 ‘근로능력 없음’ 판정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근로능력평가가 영국의 ‘다니엘’이 겪었던 평가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다니엘이 심장 수술로 일할 수 없는 몸 상태인데도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일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내린다.

그래서 최씨는 근로능력평가를 받기 두렵다. 일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고 사망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흉부 대동맥류로 두 차례 수술을 받은 고 최인기씨는 2005년과 2008년 두 번의 수술 뒤 버스기사 일을 그만뒀다. 계단이나 조금이라도 경사진 곳을 오를 때면 숨이 차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위해 모든 재산을 써버린 그는 54살이던 2008년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해 생계비와 의료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2010년 근로능력평가라는 것이 생긴 뒤 매해 재평가를 받아야 했다. 3년 동안은 ‘근로능력 없음’ 평가를 받고 잘 넘겼지만, 2012년 평가 주체가 지방자치단체에서 국민연금공단으로 바뀐 뒤 갑자기 ‘근로능력 있음’ 평가가 나왔다. 주치의는 이전과 다름없이 진단서에 “안정시에는 무증상이나 계단을 오르는 등 신체활동시에는 호흡곤란 증상이 발생한다”고 썼지만 공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씨는 결국 2014년 2월부터 고용센터에서 소개해준 아파트 지하주차장 청소일을 맡았다가 두 달 뒤 쓰러졌다. 수술한 부위에 감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해 8월 그는 사망했다.

최일영씨도 이 사례를 알고 있다. 마음이 복잡하다. 지금 상태라면 최씨도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마모된 디스크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최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근로능력평가를 받아보기로 했다. 근로능력평가를 받은 뒤 만에 하나 ‘능력 없음’ 판정이 나오면 쉬면서 취업을 준비할 수 있다. ‘능력 있음’ 판정이 나와도 허리디스크를 감안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지난 2월 구청에서의 상담 내용은 최씨를 절망하게 했다. 상담원은 정식으로 근로능력평가를 받아보라고 제안하기 이전에 최씨 정도의 상태로는 ‘근로능력 없음’ 판정을 받기 힘들다는 말을 먼저 했다.

상담원1  “제가 봤을 때 걸어오신 것 자체로…,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근로능력이 없다고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 걸어오신 것 자체로…,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근로능력이 없다고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상담원1

상담원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최씨의 마음은 쪼그라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평가 결과 ‘근로능력 있음’으로 나오더라도 신체활동이 적은 일자리에 참여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자활근로를 전문으로 상담하는 구청 직원은 더욱 암담한 이야기를 내놨다. 개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자활근로 배치는 불가능하고 현재로선 어떤 자활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상담원2  “자활 일자리가 하루 8시간 동안 거의 서서 하는, 짐 옮기고 청소하고 이런 것이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거의 자활 일자리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경우엔 스스로 일자리를 구하셔야 하거든요.”

현행법상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받은 사람이 생계급여를 받으려면 자활근로에 참여해야 한다. 이를 ‘조건부 수급자’라고 부른다. 자활근로에 참여했는데도 생계급여 기준(49만5천원) 이하의 월급을 받으면 차액만큼 정부에서 지원해준다. 생계급여 기준 이상의 돈을 벌면 생계급여는 지급되지 않는다. 자활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경우에도 생계급여는 지급되지 않는다. 일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어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일자리 자체가 부족하다는 상황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활근로 기회를 얻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개개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배치가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허리디스크를 앓는 최씨라 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상담원2  “젊은 분들은 스스로 일자리를 구하시는 게…. 아무래도 자활근로보다는 스스로 일자리를 구하셔서 소득활동을 하는 게 훨씬 낫거든요. 급여 면에서도.”
최일영  “그렇죠. 근데 그게 가능했다면 여기서 제가 상담을 받지는 않겠죠.”
상담원2  “아, 네.”

그걸로 끝이었다. 최씨는 상담창구를 나왔다. 새로 지은 구청의 널찍한 로비를 거쳐 광장으로 나왔다. 이른 봄의 햇살이 유리로 덧씌워진 구청 건물을 반짝반짝 비추었다. 이 거대한 건물은 최일영씨에게 어떤 온정의 손길도 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근로능력평가를 받아볼 생각이다. 지금으로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바빠졌다. 평가를 받기까지는 2개월이 걸린다. 집도 빨리 구해야 한다. 필요한 서류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다.

부모님의 소득과 재산을 조사하는 금융정보 제공 동의서를 포함해 거주지 계약서 등 12개의 서류 목록이 최씨 앞에 놓여 있다. 구청에 가기에 앞서 상담받은 동 주민센터에서는 소유한 통장 전체의 최근 1년치 은행거래 내역서도 요구했다. 은행거래 내역서는 법적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임의 서류인데 모든 신청자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최씨는 근로능력평가를 받기 위해 진단서를 떼야 한다. 허리의 질병을 증명하기 위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도 필요하다. MRI 비용은 40만~50만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벅찬 사람이 급여를 신청하는 데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이 든다. 최씨는 의아하다. 생계가 막막한 국민을 도와주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국가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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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

최씨에게 이번 대선은 어떤 의미일까. 특히 복지 공약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기본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그는 “찬성한다. 굉장히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 기본소득만이 기본소득이다. 나머지에는 기본소득이란 명칭을 붙이면 안 된다. ‘청년기본소득’ 아니라 ‘청년수당’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씨처럼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기본소득’이란 말에 소외감을 느낀다. 전 국민 기본소득이 아닌 청년층이나 노인층을 위한 ‘부분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최씨는 특히 이재명 성남시장이 내놓은 기본소득 정책에 대해 큰 불만을 드러냈다.

“사실 가장 열받은 정책이다. 개인의 건강이나 소득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이, 장애인, 농어촌으로 분류했더라. 내가 봤을 때 비현실적 조건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기초생활수급 예산을 깎지 않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최씨는 부분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그에 앞서 기초생활수급조차 받지 못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이재명 시장 쪽은 “기본소득은 새로운 예산으로 실행될 계획이기 때문에 기존 복지 예산이 깎일 염려는 없다.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한 정책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완전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최씨처럼 여러 가지 까다로운 평가를 거치는 작업은 필요 없게 된다. 기본소득의 기본 개념이 ‘심사 절차와 노동에 대한 요구 없이 모든 이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최씨도 완전 기본소득 도입에는 찬성한다.

문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최저생계비를 뛰어넘는 수준의 기본소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기 이전 단계다. 단계별 기본소득 도입과 더불어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대안을 함께 마련해야 최씨처럼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줄일 수 있다.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는 “기본소득을 도입할 경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현재보다 좀더 튼실하게 하는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들어오면 우리가 더 나빠지는 거 아니냐고 우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설익은 기본소득 정책 부작용은

또 다른 문제는 완전 기본소득이 도입되더라도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준이 되지 않으면 현재 급여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인 65살 이상 노인은 기초연금(20만원)을 받으면 기존 수급액에서 그만큼 깎인다. 모든 노인층이 같은 금액을 받기 때문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로는 기본소득이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기초수급자가 받는 금액이 한 달 50만원인데, 이 복지를 없앤 뒤 모든 국민에게 한 달 50만원을 지급한다면 이들은 여전히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정치권이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정치는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최일영씨는 성인이 된 뒤 줄곧 지지해온 야당에 계속 실망을 해왔다고 했다. 그가 지지하는 후보와 원하는 정책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스무 살이던 2002년 최씨는 첫 대통령선거 투표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보수적 이미지의 이회창 후보가 싫었다. 반면 노무현 후보는 신선했고 새로운 정치를 할 것 같았다. 상당히 막연한 이미지에 기반해서 찍은 것 같다.”

그러나 곧 참여정부에 실망했다. “기존 대통령들보다는 잘한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확실히 개혁하고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를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갔다는 점이다. 국가 어젠다를 소득 2만달러로 잡은 것도 그렇고. 삼성의 영향을 받은 점, 특별한 서민 정책을 펼치지 못한 점 등이 아쉽다.”

이런 이유로 2007년 대선에선 문국현 후보를 찍었다. “정동영 후보는 찍기 싫었다. 정 후보는 참여정부의 모든 것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새로울 게 없었다. 그나마 새로운 가치를 갖고 있고 신선할 것 같은 문국현 후보를 선택했다.”

2012년 대선에선 어쩔 수 없이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되면 안 되니까. 문재인 후보 개인이 좋아서나 민주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박근혜는 개인적 능력이 하나도 없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였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박근혜 정부를 겪으면서 최씨는 정치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더욱 빡빡해졌고 그의 집은 가난해졌다. “박근혜 정부는 4대악 척결을 외쳤다. 가장 먼저 내세운 게 부정 수급자 적발이다. 복지에는 돈을 안 들이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그가 이번 대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그러나 지지하는 후보와 원하는 정책 사이의 괴리는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야당 정치권에 실망해왔지만 최씨는 이번 대선에서도 문재인 후보를 찍겠다고 했다.

“대선 후보 가운데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문재인 후보를 뽑을 것 같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박근혜 정부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이들과 대연정을 하겠다고 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재명 시장은 선명성은 좋지만 전투적 이미지가 강해 좀 불안한 느낌이다. 문 후보는 민주당을 장악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뽑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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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후보와 원하는 정책 사이의 괴리

하지만 문재인 후보가 내놓은 공약 가운데 가슴에 와닿는 정책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보수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이 그의 마음을 잡았다. 최씨는 “정운찬 전 총리가 소득 하위 40%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내 처지에선 가장 필요한 공약이다. 그다음에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두 공약이 가장 와닿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뽑을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고 이 후보들을 뽑지는 않을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이렇게 망했는데 보수 진영에서 또 정권을 잡으면 안 되지 않나. 그분들이 이 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거 같지도 않고, 의지가 크게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 모순은 대체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최일영씨에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정책, 꼭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근로능력평가 기준을 완화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능력 있음’ 또는 ‘능력 없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단계부터 10단계 식으로 단계를 세분화해서 그에 따른 차등적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활근로와 관련해서는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해서 일자리를 배치하고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도록 자활 예산을 대폭 늘렸으면 좋겠다.”

한국판  ‘다니엘 블레이크’  최일영씨가  보내온  편지


기본소득의  ‘기본’  지켜라


기사에 도움을 준 최일영씨가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글을 보내와 싣는다. _편집자
기본소득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미비한 현실에서 연령별 기본소득은 오히려 기존 복지의 후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연령별 기본소득을 시행한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이 함께 개선돼야 할 것입니다.
저도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국가의 복지 시스템이 적어도 절대빈곤을 책임져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송파 세 모녀 사건’은 정보가 부족해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보니 왜 세 모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십분 이해됩니다.
복지 당국의 눈으로 보면 ‘송파 세 모녀’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기초수급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고, 동정의 여론이 빗발치자 국가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근본을 뜯어고치는 대신 ‘긴급복지지원’이라는 땜질 처방으로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법으로도 ‘송파 세 모녀’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대한 국가의 견해는 ‘빈민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일자리조차 만들어주기 귀찮다는 것이 국가의 태도로 보입니다. 하물며 개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일자리를 배정한다? 어림없습니다. 현장에서 겪은 느낌은 그러했습니다. 20세기 이전에 있었던 구빈원보다 후퇴한 현실입니다.
기본소득제의 취지가 ‘번잡한 복지행정 비용의 축소와 심사 과정에서 시민이 겪는 모멸감의 방지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기초생활보장제도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연령별 기본소득이 주로 논의되는 것이 저는 의아합니다. 기본소득은 전 국민 기본소득이어야 하고 그것이 당장 실현 불가능하다면 ‘저소득 빈민’부터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국가 행정망에 간단하게 포착되는 개인의 소득과 재산에 따라 저소득층에게 생계 지원을 하면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번잡한 심사도 필요 없다고 봅니다. 개개인이 복지행정 문턱을 넘어야 하는 불편과 치욕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볼 때는 이렇게 기초수급자를 대상으로 무조건적으로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기본소득입니다.
만약 정치적 이유로 연령별 기본소득을 시행한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다음과 같이 개선해야 합니다. 우선 오랫동안 복지의 공적(公敵)으로 지목돼온 ‘부양의무제’는 당연히 폐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 아니면 도’ 식의 현행 근로능력평가제는 세밀하게 단계를 나눠 지원돼야 합니다.
무엇보다 국가가 근로능력자라고 못박았으면서 정작 그들에게 제대로 근로 기회를 주지 못하는 자활근로제도는 대대적으로 개선돼야 합니다. 적어도 일하겠다는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섬세하게 배려해서 각자의 건강 상태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소득 3만달러의 선진국에 맞는 행정이 아니겠습니까.
국민에게 의무를 부과할 때는, 그리고 집권자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서는 철통같고 정밀하게 가동되는 행정 시스템이, 4차 산업혁명과 기본소득이라는 21세기적 어젠다를 논의하는 정치권이, ‘절대빈곤 해소’라는 20세기적 이슈를 해결하지 못한 채 가난한 국민을 말 그대로 ‘굶어 죽는’ 상황에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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