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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한겨레21> 기본소득 실험 1호 임지은씨의 달라진 한달살이

대학원 장거리 통학에 카드빚도 있지만 숨통 트이고 여유 싹터
등록 2017-02-10 17:06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006699">이렇게 취재했습니다
은 한국 언론 최초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2016년 9월부터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font color="#C21A1A">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font>)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고, 한 달 만에 1차 펀딩 목표금액 1천만원이 모였다.
11월27일 기본소득을 받고 싶다고 응모한 만 18~34살 지원자 206명 가운데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기본소득 1호 지급자’를 뽑았다. 1호 선정자에게는 월 135만원(세금 제외시 129만600원)이 6개월 동안 지급되고, 은 그에게 일어나는 여러 변화를 지켜보고 기록한다.
‘기본소득 1호 지급자’는 대학원생 임지은(26)씨다. 2016년 11월28일부터 2017년 2월1일까지 취재·사진 기자와 영상PD 등이 다섯 차례 임씨를 만나 인터뷰했고 수시로 문자메시지 등을 주고받으며 취재했다.
첫 번째 기본소득이 지급된 2016년 12월15일을 기점으로 임씨의 소득과 지출, 특히 지출 항목에서 식사의 질, 교제비, 교양·오락비 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좀더 자세히 살폈다. 단순히 돈의 쓰임만이 아니라, 근무·수면·식사 시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매달 기록하고 있다.
이 실시한 기본소득 관련 설문조사 문항, 한국복지패널 조사 문항 등을 참고해 기본소득 지급 이전과 이후 생각의 변화 등도 자료로 활용한다. 5월15일 기본소득 지급이 종료될 때까지 추적 보도는 이어진다.
현재 스토리펀딩에는 1360여만원이 모였다. 2천만원을 달성하면 ‘기본소득 2호 지급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펀딩 금액이 많아질수록 기본소득 실험은 확대된다.</font>
‘기본소득 1호 지급자’인 임지은(26)씨를 지난 1월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만났다. 지은씨는 지난해 12월15일부터 월 135만원(세금 제외시 129만600원)의 기본소득을 받고 있다.

‘기본소득 1호 지급자’인 임지은(26)씨를 지난 1월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만났다. 지은씨는 지난해 12월15일부터 월 135만원(세금 제외시 129만600원)의 기본소득을 받고 있다.

<font color="#00847C">2016년 12월</font>

“어디야?” “응, 학교.” 엄마가 안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임지은(26)씨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대답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2016년 12월의 어느 날, 그렇게 아픈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온몸이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 듯이 아팠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오피스텔 건물 외벽을 볼 때면 지은씨는 늘 ‘병원’을 떠올렸다. 1층 안경점의 검은 간판 속 커다란 안경 그림만 아니었다면 누구나 그렇게 착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곳에 2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집이 진짜 병원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감이 유행해 초등학교 겨울방학까지 앞당긴 터였다. 지은씨도 병원에서 A형 독감 판정을 받고 집에 격리됐다.

“밥은 먹었니?” “응.”

고향인 전라도에 사는 부모님께 독감에 걸렸다는 사실은 비밀로 했다. 걱정하실 게 마음 쓰였다. 학교가 아니라 집에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다행히 밥 먹었다는 얘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 끼는 죽, 한 끼는 밥. 집 밖에 못 나가니 배달음식으로 일주일을 버텼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지난 2년간 지은씨의 단골 식당은 오피스텔 바로 앞 ‘편의점’이었다. 3천~4천원짜리 김치제육덮밥, ○첩 반상 도시락이 즐겨 먹던 메뉴다. 돈 없는 자취생에게 편의점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유혹이다. 주변 식당만 해도 평균 밥값이 7천원 남짓이다. 배달음식은 대부분 1만원이 넘었다. 2300원 가격표가 붙은 시들한 귤 5개냐, 비타민 섭취에는 그리 도움되지 않을 듯한 1400원어치 바나나 2개냐. 편의점 진열대 앞에서 갈등하다가, 항상 바나나에 손을 뻗었다. 배달해 먹는 죽이나 밥은 분명 호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띵동~ 기본소득이 입금됐다! </font></font>

열흘 전이었다면 부모님께 꼼짝없이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하고 타미플루를 처방받는 데만 7만5천원이 들었다. 병원비와 약값을 치르려면 부모님 명의의 신용카드를 긁어야 했을 것이다. 지은씨 이름으로 만든 신용카드도 있지만 정말 ‘최후의 카드’다. 항상 아껴쓴다고 해도 연체된 카드빚 130만원은 몇 달째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얼마 갚고 나면 또다시 쌓일 뿐이다.

지은씨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공과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학교 실험실과 연구실에 머문다. 오후 5시까지는 조교로 행정 업무와 실험 등을 해야 한다. 대학원 등록금이 한 학기에 600만원이나 된다. 조교로 일해야 등록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 석사 논문도 준비해야 한다. 자투리 시간 틈틈이, 주로 저녁 시간에 공부한다. 그러다보니 따로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실험실에서 받는 월 50만원, 부모님께 받는 용돈 20만원을 합쳐봤자 항상 한 달 생활비 대기도 빠듯하다.

아프면 서럽다. 12월15일 통장에 입금된 기본소득 129만600원(세금 포함 135만원)이 없었다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아팠을 것이다.

<font color="#00847C">2016년 11월</font>

“안녕하세요. 임지은씨 맞죠? 황예랑 기자라고 합니다. 축하해요. 기본소득 1호 지급자로 뽑혔어요.” 한 달 전인 11월28일 월요일 오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지은씨는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해했다. 두 달 전 의 카카오 스토리펀딩 <font color="#C21A1A">‘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font>에 후원금 1만원을 내고 지원서를 적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소득 1호 지급자’를 뽑는 행사가 11월27일 열린다는 안내 전자우편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터였다. 기본소득을 받고 싶다며 응모한 206명의 번호가 붙은 탁구공을 추첨하던 그때(제1140호 <font color="#C21A1A">‘월 135만원, 첫 번째 기본소득 주인공이 뽑혔다’</font> 참조), 지은씨는 평소처럼 여동생과 외출 중이었다. 3살 어린 여동생과는 친구처럼 지낸다. 지은씨는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석사과정에, 여동생은 서울에 있는 한 여자대학 공대에 다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언니, 이제 과일 사먹을 수 있겠다” </font></font>
임지은씨가 동생이랑 같이 거주하는 서울 구로구 오피스텔에 있는 냉장고. 기본소득을 받은 뒤로는 딸기, 사과 등 과일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임지은씨가 동생이랑 같이 거주하는 서울 구로구 오피스텔에 있는 냉장고. 기본소득을 받은 뒤로는 딸기, 사과 등 과일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148번. 경기도에 사는 25살 임지은씨가 기본소득 1호 지급자로 선정되었습니다.” 페이스북 계정에 오른 추첨행사 녹화 동영상을 뒤늦게 확인했다. 현장에는 기본소득을 받기 원하는 지원자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수백 명이 추첨행사 생중계 방송을 시청했다.

“언니, 우리 이제 딸기 같은 과일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겠다!” 동생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경기도 용인의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지은씨에게도, 서울 구로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여동생에게도 과일은 사치였다. 딸기, 사과, 배 같은 과일은 석 달에 한 번꼴로 사먹었다.

지은씨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몇 달 전 요리책도 샀다. 하늘색 예쁜 도자기 그릇도 샀다. 하지만 마트에 갈 때마다 선뜻 손 내밀 수 있는 재료는 한정됐다. 최우선 순위는 ‘싼 재료’다. 그나마 값싼 두부를 사서 마파두부밥을 몇 번 만들어 먹고는 다시 편의점 도시락으로 돌아갔다.

‘이제 편의점 도시락 대신 요리할 재료도, 과일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겠네.’ 지은씨는 12월 말 서울에 있는 동생 자취방으로 이사해 살림을 합칠 예정이었다. ‘서울과 경기도를 통학하려면 교통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기본소득을 받으면 교통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그런 상상을 하니, 그제야 얼얼했던 지은씨 가슴속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font color="#00847C">2016년 9월</font>

우연이었다. 9월21일 밤 10시6분, 지은씨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써내려간 기본소득 응모 지원서를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올렸다. “취준생, 만 25살, 여자, 학생, 경기도 수원. 학생이라기엔 늦은 나이인지라 부모님께 용돈 받기도 죄송하고 알바를 하고는 있지만 너무 빠듯한 상황이고 이제는 취업 준비도 하여야 되는데 기본소득이 너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면 우선 취업 준비를 위주로 사용할 거 같습니다. 겉모습뿐 아니라 내 속마음까지 안락하게 보내고 싶습니다.”

그날도 지은씨는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우연히 포털 사이트 다음(DAUM) 첫 화면에서 ‘기본소득 주인공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됐다. 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첫 번째 지원자로 소개된 26살 김대환씨의 사연(제1129호 표지이야기 <font color="#C21A1A">‘우리를 잇는 1000일의 실험’</font> 참조)이 마음을 울렸다. 대환씨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또래 청년이 처한 현실은,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슬픈 농담 “나는 등골 브레이커야”</font></font>

그때까지만 해도 지은씨는 기본소득이란 개념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스토리펀딩에 후원금을 내는 것도, 이런 프로젝트에 응모지원서를 적어낸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취지라면 내가 기본소득을 받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후원금을 냈다. 1만원은 지은씨에게 나름 큰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아닌 누군가라도 6개월간 월 135만원씩 받아서 돈 걱정 없이 살았으면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난 등골 브레이커야.” 지은씨는 가끔 친구들한테 농담처럼 진담을 담아 자조한다. 고가 패딩을 입지도, 과소비를 하지도 않지만 지은씨 마음 한구석에는 부모님의 등골을 휘게 했다는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지은씨 아빠는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고향인 전라도에서 취직을 했다. 할아버지댁 형편이 어려워져서 대학 학비는 스스로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빠 덕분에 지은씨는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부모님은 대학원생 지은씨와 대학생 여동생, 그리고 아직 중학교 3학년인 막내 남동생까지 삼남매 뒷바라지에만 애쓰신다. 자기가 걸칠 좋은 옷도, 자기 입에 넣을 좋은 음식도 부모님께는 ‘자식들 교육’보다 뒷전이다.

아빠는 지은씨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한 지방 대도시에서 대학교를 다닌 지은씨는 졸업 뒤 바로 취직할 생각이었다. 졸업학기를 앞두고 영어학원을 다니고, 수질환경기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두어 달 학원도 다녔다. “대학원 간판이 있어야 취업하기도 더 나을 거다. 취업 대신 대학원에 진학해라.” 아빠의 충고에 2015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지은씨랑 같은 대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여동생도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경기도 용인 지은씨 자취방에 같이 살면서 동생은 서울 강남에 있는 편입학 학원으로 1년여간 통학했다. 학원비만 월 150만~200만원이 들었다. 동생은 지난해 원하던 서울의 한 대학에 편입학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언젠가 부모님 뒷바라지… 가능할까 </font></font>

지은씨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동심원처럼 커진다. 대학 졸업 무렵부터 동심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 무렵 아빠는 대기업을 퇴사했다. 비슷한 업종의 중소기업으로 옮겼지만, 학비 지원 혜택은 끊어졌다. 지은씨야 실험실 조교를 맡아 학비가 들지 않는다고 해도,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의 학비는 여전히 부모님 몫이다.

회사에서 학비가 지원될 때도 부모님은 한 학기에 500만원 가까운 등록금 액수만큼 지은씨에게 따로 쥐어줬다. 그 돈으로 생활비를 쓰고 저축도 했다. 마냥 부모님 돈만 받아 쓰진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시급 45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1년가량 열심히 했다.

지금 지은씨가 사는 오피스텔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40만원, 관리비 등으로 10여만원이 추가로 든다. 매달 통장에는 부모님이 월세와 용돈을 합쳐 보내주는 60만원이 꽂혔다. 부모님은 지은씨 동생에게도 다달이 80만원을 보내줬다.

지은씨는 26살이나 되어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이렇게 키웠으니 너희가 나중에 우리 뒷바라지 해야 하지 않겠냐.” 부모님은 가끔 말씀하신다. 지은씨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font color="#00847C">2017년 1월 </font>

“그런 돈을 네가 받아도 되냐?” 기본소득 1호 지급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지은씨 부모님은 신기해하면서도 걱정했다. “네가 잘해야 해. 첫 번째 대상자인데 잘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아니면 기본소득 정책도 잘 도입되지 않을 거야.” 지은씨 스스로도 “후원금으로 받은 돈인데 흥청망청 써버리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국가가 일정 소득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취지의 기본소득은 ‘시혜’가 아니라 ‘권리’다. 은 지은씨한테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당신의 꿈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기본소득을 어디에 쓰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이번 기본소득 실험의 취지는 누군가에게 삶의 변화, 그것도 정답에 가까운 변화를 강제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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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출 1호 ‘빌린 돈 50만원 갚기’ </font></font>

지난해 12월15일, 기본소득 첫 달치가 입금된 뒤로 지은씨 삶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고정적 소득이 월 70만원에서 월 180만원 남짓(상단 표 참조)으로 늘었다. 앞으로 6개월뿐이란 한계가 있지만, 비어 있던 통장이 정기적으로 채워진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냐?” 휴대전화 너머로 선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은씨는 가장 먼저 대학교 선배 몇 명한테 빌렸던 50만원을 갚았다. 돈을 빌린 지 석 달 만이었다. 월 70만원으로 생활하다보니 항상 30만원 ‘마이너스 인생’이 계속됐다. 카드빚이 계속 쌓이고, 공과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차마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대신에 친한 선배들한테 손을 벌렸다. 여전히 카드빚 130만원은 남아 있다.

빚을 갚고 나니 하고 싶던 게 생각났다. “언니, 이 드로잉 수업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배우고 싶다.” 서울 홍익대 근처에서 진행되는 드로잉과 가죽공예 수업을 욕심냈지만, 강좌비나 재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포기한 터였다. 대학원 진학 뒤 변변한 취미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은씨는 가죽공예, 동생은 드로잉. 주말마다 둘이 함께 삶의 즐거움을 찾기로 했다. 월 60만원으로 두 자매는 행복해졌다. 1월15일, 지은씨는 가죽으로 카드지갑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친구들한테 선물로 만들어줄 것이다.

기본소득 응모지원서에 적었던 취업 준비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아니어서 잠시 미뤘다. 2월이면 석사 4학기 과정이 끝난다. 이제는 한 학기 더 다니면서 논문 쓰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텅 빈 마음, 냉장고 모두 풍성해져 </font></font>

마음만 풍요로워진 게 아니다. 식탁도 풍성해졌다. 부모님이 매달 보내주는 밑반찬 외에 냉장고가 텅 비어 있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과일과 고기 등이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무엇보다 편의점에서 돈 쓰는 게 줄었다. 편의점 도시락 대신 한 달에 두세 번 고기를 사먹었다. 외식비가 전달보다 늘었다(상단 표 참조). “이렇게 고기와 과일을 먹게 된 것도 기본소득 덕분”이라며 동생이랑 가끔 까르르 웃는다.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도 늘었다. 커피숍 가는 비용이 부담돼 만남이 점점 뜸해지던 친구들을 1월에만 세 차례 만났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이렇게 고기와 과일을 먹게 된 것도 기본소득 덕분”이라며 동생이랑 가끔 까르르 웃는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기본소득이 가져온 변화 못지않게 생활공간의 변화도 컸다. 12월30일, 지은씨는 서울에 있는 동생 자취방으로 이사했다. 부모님 허리를 휘게 하는 월세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다. 기본소득을 받게 되어, 관리비는 지은씨가 내기로 했다. 기본소득을 받는 6개월 동안은 부모님한테 용돈도 받지 않기로 했다.

마음의 여유는 한결 생겼지만, 실제 생활은 훨씬 빡빡해졌다. 통학하는 데 하루 왕복 4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학교 앞에 살 때는 걸어서 15분이면 학교에 도착하니 늦잠도 잤는데 이제는 새벽 5시30분, 아무리 늦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서울 을지로에서 학교까지는 광역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린다. 다행히 아침에 서울에서 경기도로 나가는 승객은 많지 않다.

하루 4시간으로 수면 시간이 줄어든 탓에, 버스에 앉기만 하면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든다. 밤에도 11시쯤 집에 도착하니, 예전처럼 책 읽을 시간도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볼 시간도 없어졌다. 항상 피곤해서 난생처음으로 4만~5만원짜리 비싼 영양제를 제 돈으로 사서 챙겨 먹고 있다.

‘기본소득이 전부가 아니구나’ 싶다. 기본소득에는 노동시간 단축 등 사회 전반의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지은씨의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취업이다. “부모님이 돈 대주실 수 있을 때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 같은 취업 컨설팅을 받아둬. 부모님 도움 없으면 하고 싶어도 못해.” 친한 선배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지은씨는 대기업이나 국책연구소에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한 선배들도 100% 취업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6개월에서 1년가량은 취준생으로 살아야 한다. 애써 들어간 회사도 국책연구소의 경우엔 연봉계약직이나 무기계약직이 많아 초봉 2천만원대에서 시작해야 한다. 4학기 대학원을 다니며 등록금으로만 2500만원 가까이 쏟아부었는데 취업 첫해에 ‘본전’도 못 챙기는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본소득만으론 안 된다’ 깨달음</font></font>

지은씨 아버지 세대가 취업한 1980년대 후반과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아빠는 그때만 해도 대졸자들 취업 1순위가 대기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2순위’였던 대기업에서는 연봉 1억원과 학자금 등 각종 복지 혜택이 뒤따른다.

지은씨 세대는 아예 꿈조차 꾸지 않는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경제적 계층을 1~10(가장 낮은 계층이 1, 가장 높은 계층이 10)단계로 나눠본다면, 부모님은 7단계, 지금의 자신은 4단계에 있다고 여긴다. 아빠 나이가 되면 더 올라갈 수 있을까? 겨우 하나 올라가 5단계에 머물 것 같다.

지난해 공식 청년실업률은 9%대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졸업을 유예한 상태에서 구직 중인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실질실업률은 30%가 훌쩍 넘는다. 취업했다고 끝도 아니다. 중소기업에 취직한 지은씨 친구들 대부분은 이직을 준비 중이다. “미래의 내 모습이겠구나”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나마 지은씨의 삶은 기본소득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였다. “기본소득이 실제 도입된다면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것 같아요. 통장에 단돈 100만원만 있어도 마음이 여유로워지잖아요.” 지속 가능한 희망이면 더 좋으련만. “올해 운은 (기본소득 1호 지급자 당첨으로) 다 써버린 거 아닐까?” 지은씨가 동생에게 물었다.

<font color="#008ABD">글</font>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font color="#008ABD">사진</font>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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