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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기본소득 조건 따져보니

기본소득에 대한 대선 주자들 견해 총정리… 문재인도 ‘기본소득’ 긍정적
등록 2017-03-09 21:44 수정 2020-05-03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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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30만원 토지배당과 연 100만원 생애주기별·특수 배당’(이재명 성남시장)

‘아동·청년·노인 기본소득 도입’(심상정 정의당 대표)

‘소득 하위 40% 국민에게 월 30만~35만원 기본소득 지원’(정운찬 전 국무총리)

이재명·심상정·정운찬의 기본소득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예비후보들이 내놓은 기본소득 공약들이다. 똑같이 ‘기본소득’이란 이름표를 붙이긴 했으나 형태와 실현 방안 마련 등은 천차만별이다. ‘한국형 기본소득제’ 도입 방안을 발표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청년기본소득법안’을 발의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기본소득을 공식적으로 내세운 예비후보는 이재명, 심삼정, 정운찬 등 3명으로 줄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국토보유세’를 신설해 걷은 세금 15조5천억원을 바탕으로 모든 국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연 30만원의 토지배당을 지급하고, 아동·청년·노인 등 만 30살 미만과 만 65살 이상 연령대에게 생애주기별로 연 100만원, 그리고 농어민과 장애인에게 1인당 연 100만원의 특수배당을 지급하는 방안의 기본소득 공약을 내놨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0~5살 아동, 19~24살 청년, 65살 이상 노인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부분 기본소득’을 우선 실시해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노동시장 바깥쪽에 있는 시민들에게 먼저 기본소득을 지급한 뒤 단계적으로 노동시장 안쪽까지 확대하자는 방안이다.

최근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기본소득 전면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1단계로 소득 하위 40%에 해당하는 국민 2천만 명에게 월 30만~35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정 전 총리 쪽은 이후 2단계로 소득 하위 60%에게 월 10만원, 3단계로 모든 국민에게 월 10만원씩 기본소득을 주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여론조사 1위 후보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아직 기본소득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기본소득이란 ‘카드’ 자체에는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 문재인 캠프의 한 관계자는 “기본소득이 제안된 배경과 기본소득의 가치를 존중한다. 현시점에서 (모든 국민에게 지급하는) ‘완전 기본소득’ 도입은 어렵겠지만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등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기본소득을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 쪽은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 소요 예산 등을 감안해 조만간 발표할 복지 공약에 기본소득을 포함하는 방안을 저울질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동수당·청년수당 도입 등 ‘부분 기본소득’ 형식을 띨 전망이다. 문재인 캠프 관계자는 “완전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기본소득’이란 단어는 쓰려 한다”고 귀띔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쪽도 기본소득 도입을 내부 논의 중이다. 안 전 대표는 기초생활보장제, 기초노령연금, 실업급여제도 강화 등 ‘국민 기본보장제’를 공약으로 내놓은 바 있다. 기본소득보다는 기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방향에 무게중심을 둔 셈이다. 안철수 캠프의 한 관계자는 “기본소득은 재원이 많이 소요돼서 증세 등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증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면 기본소득도 검토해야 할 정책 가운데 하나다”라고 말했다.

바른정당의 대선 주자인 유승민 의원도 “기본소득은 장기적으로는 검토해볼 만하다”(1월26일 tbs 교통방송 라디오 인터뷰)고 말했다. 하지만 ‘저부담 저복지’인 한국 상황에서 당장 도입은 어렵다고 여긴다. 유 의원은 지난 3월2일 복지 공약을 발표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 혜택을 차상위계층까지 확대하고 소득 하위 50%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차등 인상하는 등 ‘복지 사각지대’ 해소 공약을 내놓았다.

같은 당의 남경필 경기지사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기본근로’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소득 보장보다는 일자리 보장이란 뜻이다. 남 지사는 2월26일 ‘일자리 넘치는 대한민국’ 공약을 발표하면서 한국판 뉴딜정책으로 최대 1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연 2천만원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근로’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안희정 지사 “공짜 밥” 비판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가장 높인 대선 주자는 안희정 충남지사다. “기본소득제는 연구할 가치는 있는데 지금 당장 하기에는 우리 재정 순위와 재정 여건상 안 맞는 듯하다. 너무 빠르다.” 안 지사는 지난 2월11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노동시장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은 분배와 제도 자체를 혁신해야지, 기본소득제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접근하는 건 성급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1월 대선 출마선언문에서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공약을 비판했던 것보다 어조가 다소 부드러워지긴 했다. 하지만 안 지사에게 기본소득은 여전히 ‘개 발에 편자’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줄 게 아니라) 근로능력을 상실한 절대적 약자부터 돌보자”(1월26일 인터뷰)는 것이다. 노인, 장애인, 여성 등 복지에도 우선순위가 있어 “타이타닉호에서 구명보트에 타는 순서대로 재정을 지출해야 한다”(1월23일 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는 시각이다.

기본소득은 여러 의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접점에 위치한다. 분배와 성장, 복지와 경제, 일과 노동, 청년과 노인 등의 이야기가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에서 때론 교차하고 때론 충돌한다. 대선 주자들 사이에 오가는 논쟁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대선 주자들 모두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카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선 동의한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존 복지제도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이다.

하지만 해결책에서는 둘로 나뉜다. 복지국가 체제를 중시하는 쪽에선 사회수당(아동수당·노인수당 등 특정 연령층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현금 지원 정책)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의 공공부조, 실업급여 등의 사회보험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희정, 안철수, 유승민 후보 등의 문제의식도 비슷하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교수)는 현재 논의되는 ‘부분 기본소득’은 ‘가짜 기본소득’이라고 비판한다. 아동·노인·청년 수당 등은 기본소득이 아니라 서구 복지국가에서 주는 사회수당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반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쪽에선 ‘부분 기본소득’이 ‘완전 기본소득’으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라고 판단한다. 이재명, 심상정, 정운찬 후보가 대표적이다.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뜻한다. 소득이 적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국가(사회)가 나를 지원해달라고 개인은 ‘증명’할 필요가, 국가는 ‘심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부분 기본소득? 사회수당?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소장은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부에 대해 ‘공유자’의 지위를 가진다는 전제 아래 이뤄지는 사회배당이다. 심사를 거쳐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지급되는 ‘필요의 원리’에 기반한 사회수당과는 원리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둘은 대립적인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결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동·청년·노인에게 낮은 금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이보다 많은 액수가 필요한 아동·청년·노인을 선별해 사회수당을 추가 지급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온 대선 공약 가운데 기본소득의 철학과 원리에 가장 가까운 공약은 이재명 성남시장의 토지배당 공약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국민 모두에게 연 3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배당으로 1인당 손에 쥐는 금액은 월 2만5천원밖에 되지 않는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기존 복지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도입한다고는 하지만, 불평등을 완화하고 빈곤을 구제하겠다는 정책 도입 취지에 비춰볼 때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임금노동에 얽매이지 않는 ‘탈노동’의 상상, 가정주부·학생 등 ‘무보수’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 부여 등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꿈꿔온 미래에 도달하려면 1년에 30만원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노동당과 녹색당이 지난 총선에서 내걸었던 공약은 ‘모든 국민에게 월 30만원(또는 40만원) 기본소득 도입’이었다(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선거 공약으로 처음 내걸고 가장 열정적으로 움직였던 세력은 이재명 성남시장이 아니라 노동당과 녹색당이었다). 이재명 성남시장 쪽은 일단 실험을 시작한 뒤 국민의 공감대가 넓어지면 정책 확대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성남시는 만 24살 청년에게 연간 100만원을 지급하는 ‘청년배당’ 제도를 실시해 ‘실험 확산’의 단초를 마련한 바 있다.

여기서 또 다른 논쟁 지점이 형성된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한국 정부의 1년 예산은 400조원가량이다. 이 가운데 복지예산이 약 130조원(2016년 기준)이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월 30만원씩 지급하려면 최소 180조원이 필요하다. ‘완전 기본소득’ 도입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토지배당과 생애주기별 배당, 농어민·장애인 등 특수배당에 연간 43조5천억원이 필요하다고 예상한다. 이 중 토지배당 15조5천억원은 ‘국토보유세’를 신설해 마련하고, 나머지는 법인세 인상 등 증세와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감축 등 국가 재정 관리 강화로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400조원 가운데 법에 정해놓은 의무 지출 항목 등을 제외하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예산 항목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재원 마련 방안이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본소득 논쟁이 더 깊어지려면, 증세 등 조세제도 개혁 방안이 함께 논의돼야 하는 이유다.

증세 논의도 함께 가야

강남훈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한신대 교수)은 이재명 시장(0.3%)보다 두 배 높은 0.6% 세율로 토지보유세를 걷고 환경세와 시민세 등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연 180조원의 재원을 마련하면 모든 국민에게 월 30만원을 지급하는 ‘한국형 기본소득’ 도입이 가능하다는 재원 모형을 최근 내놓았다. 이 모형에 따르면 국민의 82%가 세금보다 기본소득을 더 많이 받는 순수혜자가 된다. 세금을 조금 더 내더라도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논리다.

기본소득은 이번 대선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의제’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충분한 논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선을 앞두고 복잡하게 얽힌 기본소득 논쟁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끝없이 비판하되, 출발선으로 돌아오지 말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정책 논쟁의 기본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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