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물고기를 그냥 준다면 그를 하루만 배부르게 할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평생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빈곤 구제나 저소득층 지원 정책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은 대체로 이렇다. 빈곤은 근본적으로 ‘생산’의 문제다. 그에게 일자리를 줘라. 능력이 안 된다면 일을 가르쳐라. 그 정책 결과물은 이렇다. 일하는 빈곤층의 의욕을 높일 목적으로 마련된 근로장려금(EITC), 잠시 일자리에서 밀려난 실업자에게 구직 노력을 전제로 지급하는 실업급여, 각종 청년취업 지원 프로그램 등등.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오늘날 전세계의 1년 어획량은 1억5400만t에 달한다. 절반은 양식업이다. 바다를 ‘떠다니는 공장들’은 특수기술을 활용해 어업을 주도한다. 잡은 물고기도 다 못 먹는 판이다. 자본 투자가 어획률을 늘렸지만, 어업 고용은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다른 실업자 어부를 양산하는 것 아닌가?
관건은 생산 아니라 분배
“대량 과잉생산과 만연한 빈곤의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생선도, 더 많은 어부도 아니다.” 문제는 ‘생산’(물고기 잡는 법)이 아니다. 문제는 ‘분배’(물고기), 그리고 분배를 둘러싼 정치다. 30여 년간 아프리카에서 빈곤, 개발 등의 주제를 연구해온 문화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 미국 스탠퍼드대학 인류학과 교수가 (여문책 펴냄, 이하 )에서 말하는 고갱이다.
이 책의 원제는 ‘물고기를 줘라’(Give a Man a Fish)이다. 퍼거슨 교수는 책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본소득 캠페인을 포함한 여러 현금지급 정책을 소개한다. 2012년 남아공 전체 가구의 44%가 노령연금, 아동보호지원금 등 한 가지 이상 보조금 혜택을 받고 있다. 남아공의 기아 가구는 2002년 29.3%에서 2012년 12.6%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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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교수는 기본소득 같은 현금지급을 비난, 경멸,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람이 물고기 잡는 기술을 배우는 대신 전체 글로벌 생산에서 일정한 배당(물고기)을 청구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때만 그는 정말로 ‘평생 동안’ 배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2017년 한국에서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이 기본소득 관련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왜 지금 기본소득이어야 하는가? 기본소득 의제가 품은 사유의 지평을 넓혀볼 새도 없이 논쟁은 순식간에 정책적·행정적 차원으로 옮겨갔다. ‘기존 복지제도 강화가 먼저 아니냐’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 거냐’는 정치적 공방 속에 ‘한국형 기본소득’ ‘기본소득을 통한 뉴딜 성장’ 등 정돈되지 않은 정치적 수사만 난무한다.
이런 가운데 기본소득의 근본적 출발점을 곰곰이 곱씹어볼 신간 두 권이 나왔다. 를 번역한 조문영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와 (개마고원 펴냄, 이하 )를 쓴 오준호 작가를 1월1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만나, 기본소득을 주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기본소득 둘러싼 오해·편견·단견…
오준호 논픽션 작가로서 일반 독자가 다소 딱딱하고 어렵게 느끼는 기본소득의 철학적 배경을 쉽게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 2014년부터 시작할 작정이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기록단으로 활동하느라 본격적 작업은 2016년에야 시작했다.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넘어 기본소득 예상 효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 했다.
조문영 2004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지도교수인 제임스 퍼거슨 교수의 수업에서 처음 기본소득을 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본소득 캠페인 자료를 분석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누구나 돈(기본소득)을 받으면 소비와 투자가 촉진돼 결국 기업에도 좋다는 신자유주의적 서사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 뒤 2012년 퍼거슨 교수가 방한했을 때 ‘의존’과 ‘권리’라는 개념을 새롭게 사유하면서 정치적 실험의 장(場)으로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기존에 한국에서 나온 기본소득 논의는 추상적 이론이거나, 외국 사례를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정도였다. 퍼거슨의 촘촘한 경험적 연구를 소개해, 기본소득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이어가고 싶었다.
두 분이 오랫동안 책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준호 작가의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밥 딜런의 노랫말처럼 바람을 타고 겨우 들려오던 기본소득이 어느새 천둥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주요 대선 공약으로 제시되는데, 왜 이렇게 기본소득이 주목받게 됐다고 생각하나.조문영 기본소득은 한국 사회가 그야말로 절벽에 와 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등 최근 출간되는 책 제목만 봐도, 언제라도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생각하기 힘든 절망감이 가득하다.
‘다 죽자’는 절망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빈자’와 ‘비(非)빈자’를 구획하는 선별 복지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진보 진영 입장에선 20여 년간 신자유주의가 삶의 모든 불안을 설명해주는 일종의 ‘주술’적 언어가 돼버렸는데, 답을 찾지 못한다는 고민이 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냉전 체제가 여전히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조금 다른 생각의 고리를 찾는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우리가 ‘무엇을 반대하는가’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로 질문을 바꿔보는 것이다. 또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주는 기본소득이 누구보다 나의 개별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현재 청년 세대에게 주는 울림도 있다고 본다.
오준호 지난해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급부상한 계기는 세 가지다. 첫째,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둘째, 경기도 성남시의 청년배당 시행. 기본소득에 대한 막연한 흥미가 ‘실제 제도화될 수도 있겠다’는 진지한 관심으로 변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셋째,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기사 이세돌한테 압승했을 때 기본소득이 포털 검색어 상위로 올라왔는데, 사람들이 더 이상 경제성장으로 일자리와 소득이 보장되고 우리 삶이 나아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직관적으로 깨닫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는 ‘일자리 창출’이란 보수의 해법이나 ‘노동과 자본의 협상을 통한 분배’라는 진보의 해법도 어려워진 상황에서 기존 정치세력들이 기본소득이란 카드를 밀리듯 꺼내는 것 같다. 기본소득이 현실화돼서 삶의 최저선이 만들어진다면 긍정적이겠지만, 정치인들이 기본소득 논의를 일자리 정책이나 경기 부양책 수준에서 가둬두려는 태도는 우려된다.
복지국가의 금기 깨는 슬로건
조문영 교수는 의 원제 ‘Give a Man a Fish’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Man’은 성인 남성을 뜻한다. 유럽 복지국가 체제는 ‘건강한 성인 남성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을 제공하고, 실업수당·산재보험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을 확보함으로써 유지된다. 이 남성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교환물로서 ‘물고기’를 정당하게 획득한다. 따라서 ‘부양자’인 남성은 노동 영역에서, ‘피부양자’인 여성과 자녀, 노인은 복지 영역에서 주로 다뤄진다. 분배는 생산보다 부차적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자리 잃은 남편이 부부싸움을 하면서 “나를 무시해?”라고 화내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와 토대가 무너졌다고 여겨서다. 그런데 자본주의 성장 신화가 무너지면서, 이제 국가는 나의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 남성은 ‘잉여’가 되지만, 과거의 선별 복지는 여전히 ‘피부양자’에게만 집중한다. 그래서 “성인 남성에게 (피부양자에게 했듯이) 국가가 기본소득(보조금)을 지급하자는 발상은 그 자체로 도발적이고, 복지국가의 오래된 금기를 깨는 슬로건”이다.
유럽 복지국가 모델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한국에서 기본소득 지급보다는 실업급여, 빈곤 지원 등 기존 사회안전망 강화가 먼저 아니냐는 반론이 여전히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데.조문영 퍼거슨 교수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유럽 복지국가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정규직 남성 임금노동자와 그 가족만을 대상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제도화한 것은 불완전한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안전망은 (임금노동에서 이탈한) ‘비정상적’ 상황에 대한 예외적인 조처다. 그런데 오늘날 실업이 비정상적 상황인가?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자)가 비정상적 상황인가? 오히려 반대다. 정규직 임금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삶이 오히려 비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더구나 사회안전망 안에 누구를 포섭할 것인지 가려내는 과정에서 오히려 분열과 적대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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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의 보편적 몫으로서 기본소득을 받아야 한다고, 국가에 의무교육을 기대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기본소득을 기대한다고 주장한다면 사회안전망을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른 정치적 풍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는 건, 모두가 세월호 배지를 달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유가족들이 길을 지나다가 세월호 배지를 보면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구나’ 생각되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지금 어마어마한 절벽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절망감, 물질의 빈곤, 관계의 빈곤, 소통의 빈곤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같이 받는다는 건 ‘우리가 한배를 타고 있다’는 선언과 같다. ‘나의 빈곤’과 ‘너의 빈곤’을 연결해주고 서로의 아픔을 알아봐주려는 선언.
오준호 일부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공공복지를 축소하고 기본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안전망이 먼저냐 기본소득이 먼저냐는 문제제기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 가지를 대립시켜놓고 서열을 매기는 논리가 맞냐는 의문이다. 같은 논리로, 치안이 먼저냐 사회안전망이 먼저냐는 논란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깨끗한 물을 마시는 동시에 안정적 주거를 보장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본소득과 기존 공공복지도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전제로 어떤 기본소득이 올바르냐, 어디서 재원을 확보할 거냐를 논의할 수 있다. 지금은 여러 가능성이 각축 중이다.
나와 너의 빈곤을 연결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오준호 핀란드 등에서 여러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 중이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인류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바닥을 높이는 과정인데, 바닥을 높인 뒤 큰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를 어떻게 끌고 갈지는 또 다른 노력과 기획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정치권에서의 기본소득 논의는 기존 경제방식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라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소득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매개이자 수단이란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본소득으로 삶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면, 최순실 사태 같은 불의와 편법이 벌어졌을 때 더 많은 사람이 과감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시민이 자기 삶에 자신감이 있을 때 정치공동체 구성원으로서도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우리를 대한민국의 종업원에서 주권자로, 을에서 갑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조문영 기본소득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기본소득을 ‘정당한 몫’이 아니라 ‘국가의 시혜’로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의가 기본소득의 정책적 실효성 공방으로만 치닫지 않았으면 한다. 기본소득이라는 ‘몫’의 정당성을 계속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언어와 사유 방식이 다른 연구자, 운동가, 행정 관료가 함께 모여야 한다. 의 남아공 사례만 해도 현금지급 보조금 행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이 어떻게 바뀌는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분배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끄집어낼 보물창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근대사의 폭력과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 한·중·일이 ‘영구 평화기금’을 조성해 기본소득 형태로 나눠줄 수 있다면 어떨까? 이미 선진국이 후진국을 지원해주는 대규모 ‘빈곤 산업’으로 전락해버린 개발원조 시스템의 재원을 ‘지구 기본소득’으로 전환해보면 어떨까?
이런 새로운 상상력, 의미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할 아이디어를 기본소득이 제공해줄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다양하게 나오는데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만들어갈까’ 계속 고민해야 한다.
비평·냉소보다 실험·상상을
“우리의 정치는 연역적이기보다 귀납적이어야 하고, 판단적이기보다 실험적이어야 한다.” 기본소득 같은 프로그램이 분배정치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에서 퍼거슨 교수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이론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정말로 확신 있는 대답은 오직 경험과 실험을 통해 주어질 것”이라고. 한국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에서도 냉소보다는 호기심이, 비평보다는 실험이 필요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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