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요. 그런데 과연 시행될 수 있을까요? 기본소득 없이도 윤택하게 사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이야기를 하면 될까요?”(김한결)
“시민배당의 득과 실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요.”(소라)
10대 청소년들이 ‘기본소득’ 또는 ‘시민배당’을 주제로 둘러앉았다. 지난 10월14일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열린 제8회 서울청소년창의서밋 개막행사의 주제는 ‘세상을 살리는 질문’이었다. ‘공기, 물, 그리고 땅은 누구의 것일까?’ 조한혜정 하자센터장(연세대 명예교수)은 자연과 같은 공공재에 대해 시민이 갖는 권리로서 받는 돈이 시민배당과 기본소득이라고 설명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10대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복지국가에 걸림돌? 디딤돌?</font></font>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가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10~11월만 해도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정치권을 아우르는 토론회가 곳곳에서 열렸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녹색전환연구소는 각각 ‘기본소득 학교’를 진행 중이다. 이재명 성남시장, 심상정 정의당 대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기본소득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겠다고 밝히면서 ‘기본소득 기본법’을 만들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 에서는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출연해 ‘부루마불’과 비슷한 ‘기본소득 보드게임’을 진행한 결과를 11월27일 방영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기본소득’이란 단어가 공중파 TV 화면과 10대 청소년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기본소득을 둘러싼 깊이 있는 논쟁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국내에 기본소득 관련 학술논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9~2010년께다. 그나마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소수 학자들만 관심 있는 주제였다. 그러다가 기본소득이 주목받으면서 학계에서도 찬반 논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11월23일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이사장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주최로 열린 ‘기본소득, 대안이 될 수 있나’ 토론회, 11월1일 김부겸·인재근 의원실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청년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정책토론회’, 10월17일 참여연대 참여사회포럼이 주최한 ‘기본소득 전략, 복지국가 건설의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토론회 등이 이어졌다.
정치권은 이미 내년 대통령선거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기본소득을 주목했고, 학계도 논쟁에 살을 붙여나가고 있다. 최근 토론회에서 오간 찬반 논쟁의 핵심 쟁점 4가지를 정리해본다.
<font size="4"><font color="#00847C">① 기본소득인가, 사회수당인가</font></font>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소득을 말한다. 현재 자산이나 소득이 극히 적은 극빈층에게만 지급되거나, 과거 또는 미래에 임금노동을 했거나 할 것이라는 전제로 지급되는 다른 소득보장 정책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주로 논의되는 기본소득의 결은 조금 다르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일종의 기본소득 모델로 시행한 ‘청년배당’ 정책은 시민 모두가 아니라 만 24살 청년에게 지급하는 방식이고, 대선 주자들이 공약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힌 기본소득 방안도 청년기본소득, 아동기본소득 등 특정 인구집단에만 지급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만 0~5살 영·유아에게 지급하는 가정양육수당을 ‘아동기본소득’으로, 만 65살 이상 노인 70%에게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을 ‘노인기본소득’으로 이름표만 바꿨다는 비판이 나올 법하다. 굳이 기본소득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이미 유럽 복지국가에선 사회수당 형태로 실현되고 있는 복지정책이다.
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경제활동 바깥의 취약계층인 아동, 청년, 노인에게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언급한 것이고, ‘전면적 기본소득’으로 넘어가는 단계적 접근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 굳이 기본소득이란 표현을 썼냐고 묻는다면, 대상별로 청년배당법·아동수당법을 각각 만들어 세대 간 갈등 요인을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기본소득이란 하나의 틀 안에서 의제로 제시하는 게 좀더 공세적일 수 있겠다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용어 자체가 다분히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고민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청년기본소득 등 ‘부분 기본소득’이 ‘전면 기본소득’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라는 입장도 존재한다. 부분 기본소득이나 사회수당이 같은 정책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기본소득 철학이 정책 밑바탕에 깔려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동·청년기본소득은 사회수당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왜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체제보다 우월한지 논거를 제시해줘야 하는데, 기본소득이 사람을 모으는 ‘대증적’ 정책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본소득이 본래 갖고 있는 체제 전환적 성격은 사라지고, 그저 돈 많이 드는 관대한 소득보장 정책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행정학·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의 비판은 곱씹어볼 만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47C">② 기존 복지제도의 대체인가, 보완인가</font></font>왜 다른 대안이 아니라, 기본소득이어야 할까. 김교성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전통적 ‘복지국가’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진단한다. 복지국가에서 노동-자본-국가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상호 협력했다. 국가와 기업은 충분한 임금을 제공해주고 관대한 복지제도를 통해 나름 ‘평등한 사회’를 경험하게 해줬다. 여기에는 ‘완전고용’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대부분의 복지제도는 노동시장에 건강한 노동력을 끊임없이 공급하기 위해 노동과 연계된 형태로 운영됐다.
그러나 임금이 줄어들고, 일자리도 줄어들면서 완전고용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학자들은 기본소득이 기존 노동 중심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복지국가의 운영을 위한 시도다. 다양한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할 수도 있으나 다른 사회서비스 분야의 확장을 지지하며 ‘저부담-저복지’의 굴레를 넘어 ‘보편부담-보편복지’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기획이다. 국민 다수(70∼80%)를 복지의 순수혜자로 만들어 진정한 복지국가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기존 소득보장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표 참조). 첫째, 실업수당·산업재해보험 같은 사회보험제도는 임금노동자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둘째, 아동·장애인·노인 같은 특정 집단의 문제는 출산수당·양육수당 같은 각종 사회수당 형태로 지급된다. 셋째,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최후의 안전망인 공공부조제도는 자산·소득을 조사해 기초생활수급비 또는 근로장려세(EITC) 등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러나 공공부조는 대상이 제한적이다. 더구나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기존 사회보장제도와 공공부조로는 메워지지 않는 이른바 ‘사각지대’가 늘어나고 있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정규직 임금노동자와 같은 표준적 고용관계가 해체돼 기존 소득보장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확대되고, 빈곤한 노동자가 공공부조를 받더라도 소득이 늘면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우승명 한신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려면 기존 복지제도를 어떤 식으로 재편하고 그 속에서 기본소득을 어떻게 배치할지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소득보장 차원에서 지급되는 연금,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전체를 기본소득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일부만 기본소득으로 전환하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70여 개에 달하는 장애인 복지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취업준비자,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한 청년 실질실업률은 30%가 넘는다. 청년 10명 중 3명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셈이다. 용케 노동시장에 들어가더라도,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노동에 시달린다. 청년기본소득이 유독 공감대를 얻는 이유다.
이승윤 교수는 “청년들이 노동시장에서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렛대 구실을 청년기본소득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입 대비 산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투자의 원리’보다는 시민으로서 청년이 갖는 기본 권리를 국가가 적절한 수준으로 책임지는 ‘보장의 원리’로 이행할 때다”라고 말했다.
“미래에는 컴퓨터와 로봇이 사람들의 직업을 대체하고 결국 정부가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전망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미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원장의 생각도 비슷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일자리 구조로 보면 한국에서 2020년까지 일자리 부족은 불가피하다. 2020년에는 1.7명당 1명씩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 지금 청년들한테 일자리도 없는데 노인을 부양하라면 누가 하겠나? ‘내가 어려울 때 국가가 뭘 해줬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국가 운영 목표가 경제성장이 아니라 행복 쪽으로 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본소득이 하나의 시대를 구분하는 의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47C">④ 실현 가능한가</font></font>가장 큰 문제는 재원이다. 조남권 보건복지부 복지정책관은 “고령화 때문에 건강보험료 지출이 늘어서 2060년에는 사회보장지출이 GDP의 30%가량 될 것”이라며 기본소득 도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17%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이를 OECD 평균인 34%대까지 높이거나, 토지세·증권양도소득세 등을 신설하자는 안이 나온다.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는 ‘공유지’(commons) 또는 공유자원에 대해 시민이라면 누구나 ‘N분의 1’의 권리를 갖는다며, 현대자동차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사들인 뒤 서울시에 내놓은 공공기여금 1조7천억원 같은 돈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기금화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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