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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으로 기본소득을!

<한겨레21> 기본소득 소재로 한 보드게임 공모전 진행…

현실에선 스토리펀딩으로 기본소득 지급, 가상 보드게임으로 기본소득 경험하도록
등록 2016-12-06 22:01 수정 2020-05-03 04:28
SBS 창사 특집 대기획 <수저와 사다리>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모의실험을 게임 형식으로 진행했다. 게임에 참가해 ‘흙수저’를 뽑은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 SBS <수저와 사다리> 화면 갈무리

SBS 창사 특집 대기획 <수저와 사다리>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모의실험을 게임 형식으로 진행했다. 게임에 참가해 ‘흙수저’를 뽑은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 SBS <수저와 사다리> 화면 갈무리

“금수저만을 위한 세상인 것 같아요. 들러리 서는 흙수저인 우리는 처음엔 불안하다가, 빚지고 나서는 체념하게 됐어요.”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11월27일 방송된 SBS 창사특집 대기획 3부작의 마지막 편 ‘모두의 수저’는 표 의원을 포함해 변호사, 학원강사, 학생, 음악인 등 8명을 초대해 ‘부루수저 게임’을 진행했다.

게임 참가자들은 먼저 ‘수저’가 든 상자를 뽑아 자신의 계급부터 정했다. 게임에 ‘수저 계급’을 적용한 것이다. 운 좋게 금수저를 뽑은 1명은 1천만원으로 땅 10곳을, 은수저 2명은 각 500만원으로 땅 5곳을 골라 살 수 있다. 흙수저 4명은 각 100만원으로 가장 값싼 땅 1군데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표 의원은 ‘흙수저’였다.

이 게임에서 출발선이 다르면 역전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게임판에서 이동하다가 다른 게임 참가자의 땅에 머물면 통행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 로 알려진 게임과 비슷한 규칙이다. 금수저는 땅이 많으니 앉은자리에서 돈을 쓸어 담는다. 반면 흙수저는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빚이 늘어난다. 게임 시작 35분 만에 흙수저들은 모두 빚을 졌다. 45분간의 전반전 게임이 끝났을 때 표 의원에게 남은 돈은 16만원. 흙수저들 중에는 파산한 사람도 있었다.

기본소득 주면 ‘수저 계급’ 달라질까

후반전에는 게임 규칙을 약간 바꿨다. 갖고 있는 땅값의 10%, 임대소득과 앞으로 얻을 수익의 3분의 1은 무조건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국고에 206만원이 쌓였다. 이 돈은 모든 게임 참가자가 두 차례씩 주사위를 던진 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5만원씩 나눠줬다. 이른바 ‘기본소득에 관한 모의실험’이다.

기본소득을 나눠준 뒤 전반전과 후반전 게임 결과가 달라졌을까? 계급이 바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수저와 은수저는 재산이 약간 줄었을 뿐이다. 하지만 흙수저들은 달랐다. 빚이 줄어들거나 없어졌다. 표창원 의원도 후반전이 끝난 뒤에는 최종 101만원이 남았다. 그는 “훨씬 행복하고 아까보다는 풍족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게임은 시끌벅적한 재미와 함께 묵직한 고민을 던져줬다. 태어날 때부터 불공정한 출발선에 대해, 부유세와 토지세에 대해,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비록 가상 세계였지만, 기본소득을 경험한 참가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민주주의도 한때 이상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누구도 민주주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변호사 ㄱ씨는 기본소득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기본소득을 받아서 재산이 조금씩 쌓였거든요. 희망을 봤어요. 현실은 내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누구도 나를 잡아끌어 올려주지 않는데 (게임에선) 달랐어요.” 33살 ㄴ씨는 살던 곳이 재개발되는 바람에 쫓겨나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공중화장실에서 씻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주말에는 새벽 5시부터 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는 ‘나만의 옷’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고 산다.

방송은 게임 형식을 빌려, 불평등한 사회를 바꿀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이란 제도를 쉽고 재밌게 설명해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는 시청자가 아니라 직접 게임에 참가하는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을 경험한다면 어떨까.

세계 최초 기본소득 게임 만들어봅시다

은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을 시작한 지난 9월부터 기본소득을 좀더 재밌고 즐거운 상상력으로 접근해볼 기획의 하나로 ‘기본소득 보드게임’을 생각하고, 국내 최대 보드게임 회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와 공모전을 준비해왔다.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종잣돈을 모아 월 135만원 기본소득을 직접 지급해보는 시도가 ‘현실의 실험’이라면, 보드게임이란 매체를 통해 기본소득을 간접 경험해보게 하는 시도는 ‘가상의 실험’이다.

‘기본소득 보드게임 공모전’에는 기본소득을 소재로 한 게임 아이디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응모할 수 있다. 1시간 이내에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획안을 A4용지 1장 분량으로 간단히 정리해 내년 2월1일까지 우편(10862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요풍길 10, 코리아보드게임즈 3층 공모전 담당자 앞) 또는 전자우편(ghiot@koreaboardgames.com)으로 접수하면 된다.

2월13일 1차 심사 통과작을 발표한 뒤, 게임을 실물과 비슷하게 만든 프로토타입 심사를 거쳐 3월31일 최종 수상작을 발표할 예정이다. 상금은 1등 100만원, 2등 40만원, 3등 20만원이다(자세한 응모 방법은 62쪽 참고). 1등 수상작은 이후 보드게임으로 출판한다. 만약 상품화된다면 세계 최초의 기본소득 보드게임이 나오는 셈이다.

유증희 코리아보드게임즈 개발본부장은 “좋은 보드게임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세상을 읽는 지혜가 담겨 있다. 게임을 하고 나면 유쾌한 기억과 대화가 이어진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기본소득을 소재로 한 좋은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즐겁고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세계에 출시된 보드게임은 8만여 종에 이른다.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실험은 앞서 여러 차례 있었다. 게임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여러 방안을 실험해보려는 시도다. 게임은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재이기 때문이다. 로 알려져 있는 게임의 원본 격인 이 대표적이다. 부동산으로 돈 버는 현실을 빗댄 과 달리 에는 부동산을 임대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고 ‘빈민구제소’를 두도록 하는 등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는 여러 게임 요소가 포함돼 있었다.

인티파타 · 팬데믹 등 사회 반영한 게임들
사회문제 해결을 소재로 한 보드게임은 이미 존재한다. 전염병 창궐을 막는 협력 게임 <팬데믹 레거시>(왼쪽)와 팔레스타인 평화를 고민하는 게임 <인티파타>(오른쪽). 코리아보드게임즈, 파코루도 제공

사회문제 해결을 소재로 한 보드게임은 이미 존재한다. 전염병 창궐을 막는 협력 게임 <팬데믹 레거시>(왼쪽)와 팔레스타인 평화를 고민하는 게임 <인티파타>(오른쪽). 코리아보드게임즈, 파코루도 제공

SBS ‘모두의 수저’에서 진행한 게임은 지난해 출시돼 화제를 모은 과 진행 방식이 유사하다. 은 게임을 시작할 때 카드를 뽑아 자신의 수저 계급을 결정한다. 금수저가 2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흙수저다. 금수저는 집과 돈을 받고, 흙수저는 집 없이 돈만 받고 게임을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중간중간 법안을 발의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을 도입하자’ ‘부동산 임대료 일부를 세금으로 걷자’ 등을 제안해 법안이 통과되면 게임 규칙이 바뀐다.

지난해 출시된 보드게임 도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다. 이 게임의 무대는 팔레스타인이다. 게임 참가자들은 활동가, 종군기자, 게릴라, 구호대 등이 되어 팔레스타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원을 모으고 문제를 해결한다.

44개 카드로 주어지는 문제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공습한 팔레스타인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로 구성돼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봉쇄된 가자지구를 오가려면 게임에서도 다른 지역을 오갈 때보다 많은 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실제로 물이 부족한 서안지구를 빗댄 ‘물 부족’ 카드 등이 주어진다. 이 게임에선 문제 해결을 위해 참가자들 간에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연대’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던져주기 위한 장치다.

이 보드게임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가 신주희씨다.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좀더 다가가기 쉽고 재밌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온 아이디어였다. 내친김에 보드게임 제작회사인 사회적기업 ‘파코루도’를 만들었다. ‘파코루도’는 에스페란토 말로 ‘평화 게임’이란 뜻이다. 같은 게임 개발 외에도, 학교에 보드게임을 들고 나가 강의하거나 교육한다. 최근에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매주 을 진행 중이다. 참가자 30여 명은 각 나라의 정부나 국제기구를 맡아 10주 동안 민족 갈등, 기아, 핵 확산, 기후변화 등 50여 사회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야 한다. 게임을 하면서 세계 평화를 고민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신주희 파코루도 공동대표는 “팔레스타인 상황을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게 아니라, 보드게임은 스스로 조금씩 관심 갖고 정보를 찾아보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미국의 대표적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를 보면 대통령선거, 환경문제 등을 소재로 한 게임 아이디어가 많다. 내년에는 영문판을 제작해 킥스타터에서 펀딩을 진행할 예정이다. 기본소득도 게임을 통해 직접 그 가능성을 느껴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게임 소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모두가 이기는 게임을 위해

게임의 목표는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꼭 경쟁해서 나 혼자만 승리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게임 참가자들이 협력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임 형식도 많다. 모두 이기거나 모두 패배하는 게임 방식은 ‘승자독식 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반영한다.

흑사병, 에볼라바이러스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 ‘팬데믹’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게임 참가자들이 힘을 모으는 보드게임 가 대표적이다. 게임 참가자들은 위생병, 과학자 등이 되어 12개월 동안 전세계 곳곳을 누비며 전염병을 막아내야 한다. 이 게임은 전세계 보드게이머들이 모인 커뮤니티 사이트 ‘보드게임긱’에서 인기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다.

2016년 겨울, 현실이 웬만한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가 어떤 엔터테인먼트보다 재밌다는 자조가 넘실댄다. 지난 9월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즐거운 상상들이 흘러넘치길 바란다”고 썼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조차 저어한 시국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박근혜 시대’ 이후에 만들어가야 할 미래를 상상하며 ‘자괴감’을 떨쳐내보는 건 어떨까. 기본소득과 관련한 웹툰, 연극, 노래, 굿즈 등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상상력을 기다린다. 제안은 전자우편(yrcomm@hani.co.kr)으로.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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