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50만원이 없다고 덜 당당한 건 아니지만 자신감이 ‘업’ 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이하나(29)씨는 ‘자신감’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입에 올렸다. 하나씨는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가 서울대 사회학과에 의뢰한 연구사업의 실험자로 뽑혀 2016년 10~12월 석 달 동안 월 50만원을 지원받았다. 서울시는 월 50만원 ‘청년수당’을 지급하는 청년활동지원사업을 지난해 8월 시행했으나, 청년 2831명에게 첫달치 50만원을 지급한 뒤 보건복지부가 사업 직권취소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중단됐다. 하나씨는 2831명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도 괜찮아’라는 위로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는 사업이 중단된 뒤 ‘실험’을 하나 시작했다. 2831명 가운데 취업준비생과 공무원시험 준비생, 문화·예술계 종사자, 창업 준비자 등 분야별로 골고루 실험 대상이 될 청년 20명을 선정했다. 부모님 소득에 따라 중위 계층 10명, 하위 계층 10명으로 구성했다. 이들에게 지난해 10~12월 각각 월 50만원을 지급했다.
서울대 사회학과가 연구를 맡은 A그룹은 학원·교재비 등 직접비로만 쓸 수 있도록, 서강대 사회학과가 연구를 맡은 B그룹은 직접비 외에 식비·주거비로도 쓸 수 있도록 실험을 설계했다. 하나씨는 A그룹 소속이다. 청년들은 매달 활동지원금 사용 내역과 활동 내용 등을 보고서로 제출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2시간 동안 그룹인터뷰(FGI)도 진행했다. 하나씨가 ‘자신감’을 강조한 건 지난 1월7일 마지막 인터뷰 자리에서다.
‘청년수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본소득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아무 조건 없이 지급하는 현금성 지원이다. 청년수당은 서울시가 청년들에게 활동계획서를 받은 뒤 소득과 계획서 내용 등을 심사해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월 50만원의 현금을 지원한다는 점, 그동안 복지정책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던 청년을 지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청년기본소득’ 논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은 청년수당을 주목해왔다.
특히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진행한 석 달간의 ‘청년수당’ 지급 실험은 의 카카오 스토리펀딩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와도 비슷한 측면이 많다. 기본소득 또는 청년수당을 실제로 지급하면서 해당 정책의 효과나 여러 논란을 앞당겨 투영해보는 방식이다.
은 서울대와 서강대의 연구용역 보고서, 각 그룹별 인터뷰 내용을 기록한 12건의 녹취록, 청년수당에 대한 온라인 여론과 그룹 인터뷰 내용을 단어의미연결망 등으로 분석한 데이터 분석 전문기업 ‘아르스프락시아’ 보고서 등을 종합해 청년수당 지급 실험 결과를 살폈다. 청년 20명 가운데 4명은 직접 만나거나 전화 인터뷰했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는 2월20일 ‘청년안전망, 청년수당으로 가능한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어 관련 실험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2월1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건물 앞에서 만난 하나씨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커피 하나무라’. 하나씨가 창업하는 카페 이름이다. ‘무라’(Mura)는 일본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커피와 하나 되는, 커피를 향한 하나씨의 꿈이 여무는 마을.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7평 남짓한 공간에선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근처에서 카페트럭을 운영하던 하나씨는 1월 초 가게를 계약했다.
“비록 석 달이긴 하지만 월 50만원씩 지원받으니까 마음에 힘을 얻은 것 같아요. ‘(카페트럭이 아니라) 매장을 열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다음달 문을 열 카페에서는 커피는 물론 커피를 활용한 알콜 음료와 간단한 안주거리도 팔 예정이다.
지난해 여름, 하나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가 수술 중일 때 청년수당 지급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쓰러질 듯 힘든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씨는 당시 카페트럭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씨의 인생 궤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처음 쓰러졌을 무렵부터였다. 어렵게 미대에 진학했지만 비싼 등록금이 부담돼 중퇴했다. 스무 살부터 서빙 아르바이트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돈은 있었지만, 꿈은 없었다. 20대 중반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 꿈이 생겼다. 커피숍에서 일하며 어깨 너머 커피를 배우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엔 한국커피협회 지도사 1·2급, 바리스타 1·2급 자격증도 땄다.
석 달 동안 받은 150만원은 주로 커피 원두, 카페트럭에서 사용하는 발전기를 돌릴 휘발유 구입비 등으로 썼다. ‘라테아트’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니고, 혼자 연습할 우유도 마음껏 살 수 있었다. “카페트럭에서 커피 한 잔을 2천원에 팔거든요. 커피 맛을 알아봐주는 단골 손님들이 생겨서 월 150만~200만원은 벌었어요. 그래도 새로운 메뉴 개발하려면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봐야 하는데 재료 구입비가 부담되죠. 라테아트 연습을 하려고 해도 우유는 대부분 버려야 하니까요. 월 50만원씩 받으면서 통장이 두둑해지니까 장사가 잘 안 돼도, 메뉴 개발에 실패해도, 장사를 접고 아빠가 입원한 병원에 가더라도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마음의 위로가 되더라고요.”
청년수당은 꿈을 틔우는 ‘씨앗-자본’다른 연구 참여자들의 마음도 비슷했다. ‘아르스프락시아’가 그룹인터뷰 내용을 분석해 그려본 단어의미연결망(상단 그림1)을 보면 ‘청년수당’→‘사업’으로→자신의 ‘계획’에→‘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취업’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공부’할 ‘시간’을 확보했다는 만족감도 컸다.
2016년 최저시급 6030원을 기준으로 하면, 아르바이트 83시간으로 벌어야 할 돈 50만원을 지급함으로써 청년들에게 월 83시간의 시간 자원을 지원해준 셈이다. ‘취업’이라는 단어의 비중이 큰 이유는 참여자 20명 가운데 취업준비생이 6명, 공무원시험 준비생이 6명으로 절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 상당수는 라는 경제적 악순환뿐만 아니라 와 같은 심리적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서울대 사회학과 연구보고서) 청년수당은 청년들을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꿈을 틔울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씨앗-자본”이었다.
“청년수당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시간이라는 자원, 구직에 필요한 비용을 확보하는 동시에 급박한 생계 부담이 완화되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힘이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범퍼’(완충장치)를 줘서 불안감을 덜어주고 사회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되찾도록 한 점이 중요한 것 같다. 그들이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임파워먼트 과정이었던 셈이다.” 참가자들과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고 단어의미연결망을 분석한 김학준 ‘아르스프락시아’ 미디어분석팀장의 말이다.
취업준비생인 박지영(가명·25)씨도 청년수당이 ‘안전망’ ‘펜스’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 채용시험 떨어져도 다음달에 청년수당이 나오니까 또 준비하면 되지, 이런 느낌이요.” 지난해 8월 서울의 한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지영씨는 공기업이나 금융기업 취업을 준비 중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은 대부분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월세 30만원 등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직접 벌었다. 3개월간 청년수당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이고 취업 준비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스피킹 자격증 시험 한 번 보려면 7만8천원이 들거든요. 인·적성 시험 문제집이니 교재비니 책 한 권에 2만원이 넘어요. 필기시험 준비하려고 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어가고. 첫달에 받은 50만원은 인터넷 강의 듣고 교재 샀어요. 10월에 받은 돈으로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고, 12월에는 컴퓨터 활용능력시험을 준비했어요. 토익 스피킹 학원도 끊었죠. 지난해 여름만 해도 ‘스펙’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는데, 지원 요건을 갖추는 데 청년수당이 큰 보탬이 됐어요.”
하지만 월 50만원이 생활 조건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특히 지영씨는 A그룹 소속이라 청년수당을 주거비나 식비 등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돈을 조금 더 쓴 날에는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청년수당 정책이 다시 시행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주거비는 어느 정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과 전화 인터뷰한 2월16일, 지영씨는 병원에서 아버지 병간호 중이었다. 지영씨의 올해 가장 큰 목표는 취업이다.
“3개월 동안 통장 정리를 안 했어요”청년수당을 둘러싼 논란 가운데 하나는 청년들의 ‘도덕적 해이’다. 일종의 예비적 실업부조, 취업 지원 형태로 지급한 돈을 술 마시는 데 흥청망청 써버릴 것이라는 공격이다. 직접비로 사용 내역을 한정한 A그룹의 경우, 상단 그림2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돈의 쓰임새가 다르게 나타났다.
3개월치 지출 내역을 평균해서 살펴봤더니,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의 경우 독서실 등록비(학습 공간) 등이 절반 이상인 52%를 차지했다. 취업준비생은 미용사 자격증시험 준비를 위한 재료 구입(33%)이나 학원 등록(29%) 비중이 컸다. 예술 계통 종사자들은 악기 등 재료비·장비 구입비로 청년수당의 대부분을 썼다.
주거비, 식비 등에도 청년수당을 쓸 수 있도록 한 B그룹의 경우 식비, 주거비는 물론 의료비, 컴퓨터 소프트웨어 이용비 등 지출 내역이 훨씬 다양했다. “인턴 양복 세탁비까지 지출 내역에 넣었네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평소에 쓰는 돈은 70만~80만원이에요. 이 가운데 취업에 필요한 비용만 계산하면 58만원 정도 나와요. 그래서 청년수당의 목적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비용만 산정해 보고서에 넣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취업준비생 H의 그룹인터뷰 내용)
소설을 쓰는 이희태(24)씨는 청년수당을 받은 뒤 ‘지하’ 공동작업실을 벗어나 ‘지상’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10만원 더 비싼 작업실을 얻은 것이다. B그룹 소속이라 월 50만원은 항목에 구애받지 않고 식비, 책 구입비, 교통비, 집세 등으로 썼다.
희태씨는 2년간 다니던 회사를 지난해 여름 그만뒀다.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마침 그때 청년수당을 받았다. “청년수당 받은 3개월 동안 통장 정리를 안 했어요. 인터넷뱅킹을 안 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통장 정리를 했거든요. 모아둔 돈이 있었지만 ‘어디서 돈이 나간 거지?’ 계속 확인해봐야 했거든요. 그런데 월 50만원이 채워지니 잔고를 굳이 확인 안 한 것 같아요.”
희태씨는 올해 문학상 공모를 준비 중이다. 비록 3개월이긴 했지만 청년수당을 받아 “시간을 벌었다”는 느낌이 든다. 국가나 사회한테 처음으로 받은 복지 혜택이기에 만족감도 안도감도 더 컸다.
김도현(가명·26)씨는 운이 좋았다. 연구 패널 참가자로 월 50만원씩 받던 마지막 달인 지난해 12월 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원하던 금융기업에 취업했다. 자취방 월세 38만원 포함 식비, 교통비 등 한 달에 최소 85만원을 벌기 위해 항상 아르바이트와 과외 등에 허덕였다. 취업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월 50만원씩 받은 청년수당은 인터넷 강의비나 책값, 식비, 교통비, 통신비 등으로 썼다.
“여유가 생기니까 확실히 마음의 부담이 줄었어요. 자존감도 높아지고요. 학교에서 밥 먹을 때도 3천원짜리 학생식당과 4천원짜리 교수식당 사이에서 메뉴를 보며 5분 넘게 고민하거든요. 그때마다 ‘내가 1천원 갖고 왜 이러고 있지?’ 자존감이 낮아져요. 물론 청년수당 받고 나서도 고민은 했죠. 좋은 음식 먹을 때는 ‘활동보고서에 쓰기엔 너무 비싼 음식 아닌가’ 하면서 ‘이게 어떻게 보여질까’를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청년수당·청년기본소득, 생각이 달라졌다도현씨는 ‘밀어준다’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쇼트트랙 팀 경기할 때 보면 뒤에서 밀어주잖아요. 밀어준다고 이 사람이 1등 하는 게 아니고 경기가 끝나는 것도 아니지만, 청년들이 뭔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밀어줘서 탄력 있게 나아가도록 해주는 거죠.” 취업 성공도 어쩌면 그런 ‘탄력’을 받은 덕분일지 모른다. 마음에 쉼표를 찍었다면, 생각에는 느낌표가 찍혔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청년수당이나 기본소득처럼 현금을 직접 주는 정책에 비판적이었어요. 정치인들이 인기에 영합하려는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달라요. 취지에 좀더 공감하게 됐어요. 사람의 기본 생활비를 현금으로 지급해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경험해봤으니까요.”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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