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기 어땠어요?” 이건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다. 통신사 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신현우 전 옥시 대표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뒤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상식적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해명’이 뒤따른다. 자신이 원래 한 말은 “내 얘기 어땠어요?”라는 거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사를 잘 보면 좀 미심쩍다. 악당의 대사를 들었다는 사람은 검찰 관계자다. 이 검찰 관계자는 검찰 간부들에게도 이 내용을 보고했다고 한다. 즉 신현우 전 대표의 발언 내용을 들은 쪽도 검찰, 언론에 흘린 쪽도 검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검찰 조직의 특성을 볼 때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갖는 선입견으로는 설사 악당의 대사를 들었더라도 입에 자물쇠를 채울 사람들이 아닌가?
어찌됐건 상황을 냉정히 따져보면 이런 발언이 나오는 게 검찰 입장에선 별로 나쁘지 않다. 신현우 전 대표를 수사하는 이상 기소라는 걸 해야 할 테고, 기소를 한 이상 피의자가 높은 형량을 받는 게 여러모로 좋다.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재판에서 ‘참작’의 여지를 줄 뿐이다. 신현우 전 대표가 큰 벌을 받으려면 이 사과의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돼야 한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검찰 관계자의 행동은 이 대목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면 그동안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검찰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은 지금이야말로 검찰이 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피해자들을 못 본 체하는 건 여론의 흐름상 이제 불가능하고 정부와 기업 누군가는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보상은 우선 정부가 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책임 소재를 따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기업과 정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구조로 돼 있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한 발언을 잘 뜯어보면 이런 정황을 볼 수 있다. 윤 장관은 “법제 미비는 통감한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발언했다. 겉으론 유감을 표명한 것처럼 보이나 정부는 법에 정해진 대로 하는 곳인데 법이 애초에 부실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수사’를 다 내놓을 수 있으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게 이 발언의 핵심이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위해 재정을 지출하는 걸 ‘헛돈’ 쓰는 일인 것처럼 다뤄왔다. 특별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유감이 있어서 취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어떤 ‘사고’에 대해 쉽게 보상했다가 기업으로부터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 ‘혈세를 낭비’하게 되거나 더 큰 정치적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이 정부가 이해하지 못할 태도로 일관한 것도 같은 이유다.
20세기 말에 거대한 실패를 경험한 이후 자신감을 잃은 국가는 더 이상 국민의 삶을 책임지길 거부한다. 국가가 자신감을 회복해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국가를 바꾼다는 것은 권력과 구조를 뒤집는다는 것이다. 왜 ‘참사’가 늘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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