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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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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모임

등록 2015-04-11 17:58 수정 2020-05-03 04:27

분명, 국민들은 모이고 있다. ‘안심전환대출’이 출시된 날, 집을 샀다고 하지만 은행에 세를 내는 게 분명한. 그렇다고 팔자니 도무지 견적은 안 나와 골치가 아플 것이 또 분명한 국민들이 은행 앞에 길게 모여들었다. 가계부채 만기가 동시에 몰리면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걱정에 포퓰리즘이건 단기 미봉책이건 따질 겨를도 없이 일단 정책을 던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6%의 고정금리가 이처럼 매혹적으로 국민을 모이게 할 것임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정부는 추가분을 준비한다는 둥, 서민 주택 금융 지원책을 다시 만든다는 둥 부랴부랴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정부가 무엇을 내놓건 지금보다 대출 조건이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언제든 국민은 다시 모여들 것이다. 가계부채는 무려 1100조원에 달하고 어떤 정책을 쓴들 11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의 근원적 불안을 해소할 순 없다. 과거 정부들은 국민을 모델하우스에 모이게 해 그 동력으로 경기 전체를 부양해왔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고 이제 누가 됐건 거품의 연착륙을 위해 끊임없이 빚을 유예해줄 수단을 강구해야 할 처지다. 집을 못 가져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더 고민스러운 시대, 정부는 계속 국민을 모이게 할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물론 모임에 초청되지 못한 이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국민안심대출이 1차에서 20조원이 소진되고, 급히 편성된 2차에서도 6조원이 더 소진됐다지만, 전체 가계부채에 비하자면 조족지혈의 수준이다. 제2금융권에서 빚을 졌다든지 해서 상대적으로 더 높은 이자에 더 까다로운 조건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은 첫 번째 기회에 초대장조차 얻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국민을 모이게 하면서 동시에 누군가는 배제해버리는 정부에 비감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조만간 어디론가 모일지 모르겠다. 정부 정책이 ‘선착순’으로 혜택을 나눠주고 누군가에게만 빛이 되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도 국민들이 모였다. 세월호 유가족 52명이 삭발을 감행하는 현장은 지켜보기 버거울 정도로 참담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도 제 머리카락을 잘라 요구를 보여야 하는 이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정말이지 말론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겉으로나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강해 보였단 점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가장 강하다는 비통함의 발현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겠다던 그들의 마음에 연대하고자 했던 국민들이 망으로 모여든 탓인지 인터넷 생중계는 자꾸 ‘다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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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이 머리카락까지 자르게 된 건, 아마도 4월16일 국민이 모이는 것에 부담을 느낀 정부가 부랴부랴 일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이후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지겨울 정도로 무능과 무기력 사이만 오가던 정부는 참사 1주기를 앞두고 황급하게 ‘배·보상금’부터 밝혔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그 국민들은 숫자 놀음으로 사건의 책임이 희석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금액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돈으로 진실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것이 유가족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이 와중에 스스로를 ‘국민모임’이라 지칭한 이들은 뜻밖의 전개를 보여줬다. 국민모임 인재영입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동영 전 장관이 불출마를 번복하고, 인재 영입이 아닌 직접 선거 출마를 결정했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야권을 혁신하겠다는 그의 앞에 국민들이 꾸역꾸역 모여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1% 금리 차이에도 은행 앞에 길게 모여들어야 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풍찬노숙이 여전한 때에 그 모임이 그동안 어떤 기갈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점뿐이다.

글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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