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랍 가득 쌓인 딸의 학용품을 화제로 옆지기와 얘길 나누다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떨궜다.
장롱 깊숙이 숨겨둔 ‘버린 학용품’
가난했다. 건설노동자 아버지의 외벌이로 10식구가 먹고살았다. 5남매가 동시에 학생일 때도 있었다. 기성회비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자식을 보며 당신들은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기성회비만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용품, 교복, 준비물, 실습비, 소풍, 체육대회, 수학여행 등 돈 들어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모님과 5남매의 실랑이가 그칠 날이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부모님에게 큰 위안거리가 생겼다. 서울의 손꼽히는 부잣집 아이들이 다닌다는 여의도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친척이 학생들이 버리거나 잃어버린 학용품과 옷(찾지 않는 것은 물론 이튿날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학생들이 새것을 준비해 등교했다고 한다)을 모아 방학 때마다 우리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친척이 가져온 물품을 장롱 깊숙한 곳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우리가 요구할 때면 어머니가 직접 꺼내줬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거지새끼야?” 남이 쓰던 물건을 쓰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자기가 원하는 만큼을 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동생이 대든 것이다. 난 마음속으로 동생을 응원했다. ‘그래 더 대들어라. 나도 진작 하고 싶었던 말이다.’ 어머니는 동생의 요구대로 학용품을 꺼내주더니 밥을 짓는다며 부엌으로 갔다. 그날 난 부엌 문틈 사이로 똑똑히 봤다. 쌀을 씻으며 떠는 어머니의 어깨를, 쌀뜨물 위로 떨어지는 어머니의 눈물을….
40여 년이 흘렀지만 당시 어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옆지기와 얘기하다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은 여전히 울고 있다. 나 자랄 때보다 교육비 부담이 훨씬 커진 상황이니 어머니들의 눈물도 그만큼 많아졌으리라. 경상남도와 경기도가 ‘의무급식’(‘무상급식’이란 말은 옳지 않다. 의무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의무급식’이 타당하다)을 중단하겠다고 한다. 애들 밥은 빚을 내거나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여야 하는 게 어른의 도리일진대 먹던 밥마저 빼앗겠다고 덤빈다.
금은보화 가득한 재벌의 곳간2014년 9월 말 현재 국내 10대 재벌이 보유한 현금자산(현금,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 등)은 125조4100억원으로, 지난해 말 108조9900억원보다 16조4200억원(15.1%)이 증가했다(재벌닷컴 인용). 국회예산정책처가 제출한 ‘2008년 이후 감세정책 현황’에 의하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약 82조2천억원의 정부 세수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법인세, 소득세, 종합부동산세 등 부자감세가 71조2천억원으로 전체 감세액의 87%를 차지했다. 한 정치인은 “대기업들에 법인세 인하를 했던 걸 원위치 하면 연 5조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금은보화 가득한 재벌의 곳간만 조금 열어도 ‘의무급식’ 문제는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는다. 예산이 부족해 애들 밥을 먹일 수 없다고 하는 건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누구 말이냐고? 정치인들이 앞다퉈 존경한다고 떠드는 세종대왕 말씀이다. ‘하늘’의 명이다. 닥치고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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