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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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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에게

등록 2014-11-05 15:20 수정 2020-05-03 04:27

감독질 하다보면 늘어가는 게 논리력이다. 시나리오는, 행동과 상황들 사이의 인과관계들을 조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단편이 아니라 장편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100개에 가까운 신과, 성격이 다른 많은 주·조연 인물들, 그리고 수십 개에 이르는 아이템 계열들을 조직하다보면, 믿을 것은 논리밖에 없다. 논리적이어야 그 혼돈과 혼잡으로부터 중심 플롯을 지켜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과연 이전 장면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나? 이 장면의 근거들은 이전 장면들에 충분히 들어 있나? 나중엔 심지어 눈물까지 이리저리 재게 된다. 이 장면에서 이 캐릭터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선, 이전 장면들에서 충분히 감정이 축적되었나? 논리력에 길들여진 나머지, 감정까지 논리로 재단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때다.

세상을 버티어내는 건 논리와 참을성이라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점점 논리로 무장되어가는 것은 비단 내 작품뿐만이 아니다. 논리에 가장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이다. 기약 없는 1~2년을 버티면서 시나리오를 한 편 다 완성해내고, 또 수십 명의 스태프들을 만나면서 프로덕션 과정을 버티어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 역시 논리다. 내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그 많은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고, 때로는 묵살하기 위해선, 그러면서도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현장을- 결국은 내 손해일 뿐인- 파투 내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점잖은 논리쟁이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게다. 아마도 세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 것도, 내 자신이 점잖은 논리맨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할 때쯤이었던 것 같다. 모 정치인은 이렇기 때문에 이번에 수를 잘못 둔 거야… 누구누구의 말은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편을 못 들어주겠군… 이 댓글은 아무리 취지는 좋아도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점수를 줄 수 없겠군… 이딴 식이다.

마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난 고등학교 때 N.EX.T에 열광했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고, 주변 친구들에게 꼭 들어보라며 선동(?)하고 다녔으니깐.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신해철의 음악과 점점 거리를 두었고, 그에 대한 나의 존경과 열광을 점점 숨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가 풀어내는 음악이 어느 순간부터 논리와 근거가 없는 작품들, 즉 넋두리로 점철된 개똥철학, 대안도 없이 타협을 거부하는 푸념질, 막말에 불과한 상스러운 욕지거리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비단 가사뿐만이 아니라, 그가 했던 모든 음악적 실험들(특히 N.EX.T 2집, 비트겐슈타인, 라젠카 앨범) 또한, 비논리적이고 비개연적인 미학적 막말 드립으로 보였을 게다. 그리고 나 혼자서 속으로 외쳤을 수도 있을 게다. 지금 이 세상을 버티어내는 데 필요한 것은, 판을 파투 내고 마는 독설과 실험이 아니라, 논리와 참을성이라고. 난 점잖은 사람이 되어서 누구에게서도 욕을 먹지 않고, 그 누구와도 화평하게 잘 어울리면서, 이 세상에서 끝까지 안전하게 생존하고 말리라고.

이 시대 모든 점잖쟁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하지만 신해철의 죽음이 다른 아티스트의 죽음보다 더 큰 허망함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이젠 난 깨닫는다. 마왕이 음악적 독설로 보여준 그 치열함이야말로 바로 내가 한때 가장 존경했던 것, 그리고 세상에 길들여지면서는 내가 가장 잃어왔던 것이란 걸. 타협도 대안도 없이 마구 질러버리는 그 막말 드립, 앞뒤 잴 것도 없고 체면치레할 것도 없이 마구 달려드는 분노와 실험, 논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아닌 건 아니라며 욕 한 바가지 던져버리는 그 깡다구가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란 걸.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것들이 이 시대의 모든 점잖쟁이들, 혼돈이 무서워 자기 (사회적·정치적) 목숨 먼저 부지해보려고 중재와 타협을 너무 쉽게 찾는, 또 그러기 위해서 근거와 논리를 찾으며 스스로를 평균화해버리는 이 시대의 양반들에게 가끔씩은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마왕은 죽은 게 아니라, ‘영생의 길’로 갔다. 욕먹는 게 두려워 일부러 그를 잊어왔던 나에겐 최소한 그렇다.

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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