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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공포

등록 2014-10-20 15:49 수정 2020-05-0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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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던 한 분과 지인 몇이서 일전에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재임 시절 강직한 성품과 풍부한 식견으로 이름을 날리던 인사다. 격식을 따지지 않는 편한 자리였던 까닭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자유로이 오갔다. 대화 도중 이 인사는 “요즘 같은 때 내가 젊은 시절을 보냈다면 아마 코뮤니스트가 됐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농담처럼 툭 던졌다. 가장 보수적인 골수 ‘중앙은행맨’의 눈에도,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은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극에 달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단언컨대, 생산과 공급 중심의 경제학 패러다임은 이제 끝났다”고 몇 차례나 못을 박았다. 국민경제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개개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부족한 시절은 이미 지나갔으며, 이제는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가 팔리지 않는 상황, 즉 만성적인 수요 부족을 염려해야 하는 때라는 얘기였다. 그 비밀은 물론 구매력(가처분소득) 부족 현상이 만성화·고착화하는 데 있다.
최근 나라 안팎의 경제 여건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 무성하다. 한국은행이 숱한 우려를 무릅쓰고 역대 최저 수준으로 금리를 끌어내렸음에도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오랜 시련 끝에 서서히 경기회복 기조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돌던 미국 경제뿐 아니라, 유럽 경제 역시 좀체 맥을 추지 못한다. 이에 더해 한동안 세계경제의 ‘믿을맨’ 역할을 맡았던 중국 경제는 그간의 위상에 상처를 입은 채, 세계경제 위기론의 진앙지 신세로 전락할 기미마저 보이는 중이다.
문제는 이같은 위기 상황이 단지 경기순환 사이클상의 특정 국면을 뜻한다기보다는,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뚜렷한 징후라는 점에 있다. 세계경제를 동시에 휘감고 있는 ‘D(디플레이션)의 공포’야말로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물가란 항상 많이 오르기 때문에 걱정거리였다. 실질구매력을 떨어뜨려 살림 형편을 쪼들리게 만드는 요인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경제 주요국의 물가상승률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히 낮은 수준을 맴돌고 있다.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축복’이라는 평범한 인식과는 달리, 경제 규모의 성장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물가의 지속적 하락은 그 자체로 경제가 중증 질환을 앓고 있다는 중요한 방증이다. 재화와 서비스만 넘쳐날 뿐, 정작 그것을 소비할 구매력이 뒤따르지 못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이기에.
이 점에서 최근 나라 안팎에서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을 단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문제만으로 바라보려 해서는 곤란하다. 불평등이란 현대 시장경제 체제가 낳은 숙명적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복병이다. 최근 끝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는 이미 세계경제의 ‘메인스트림’ 내부에서조차 D의 공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한다면, 겉으로는 실세의 권위를 바탕으로 강한 정치력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진단과 처방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 채 허둥대는 ‘초이노믹스’의 현주소는 ‘순진함’마저 안겨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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