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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태연히 그곳에 있었다

등록 2014-10-14 15:2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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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지난 9월 독일 유력지 에 기고한 글엔 ‘왜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가?’란 제목이 달렸다. 한 교수의 글은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빈부 격차가 확대되는데도 왜 현대사회에선 이렇다 할 (의미 있는) 저항이 나타나지 않는지, 왜 현재의 지배체제는 그토록 안정적인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한 교수는 그 비밀을 권력의 성격 변화에서 짚어내고 있다. “통제된 산업사회에서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억압적”이었던 데 반해, 현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더 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과거의 억압적인 체제는 억압도 눈에 보이고 억압을 하는 이들도 눈에 보인다. 저항을 해야 하는 구체적인 상대, 보이는 적이 있다.” 이에 반해 현재의 사회체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제 갈등 전선은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으로 변질된 것. 한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얘기와도 맞물린다. 곳곳에서 판에 박힌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힐링’ 담론이 판을 치는 무대는, “실패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하는, 사회가 아닌 스스로를 문제로 여기는” 세상이다.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치는 ‘정연순의 말하자면’ 코너에 마지막 인터뷰이로 소개하는 20대 독립영화 감독 김경묵씨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던 중, 앞서 언급한 한 교수의 기고문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쩌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지점이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가 무엇이든 자신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데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 거죠. 내면이랄까, 내적 자아가 점점 작아진다고 할까요.” 문제의 뿌리를 짚어낸 만큼, 그가 들려준 이야기도 막힘이 없었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무한경쟁 속에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도 보지 못하게 하면서, 한편으로 그걸 자기 책임으로 돌리며 더 열심히 살라고 하잖아요. ‘너만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결국 실패하면 자신의 잘못이라는 거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우울증에 빠져 있거든요.”
이번주 마감에선 읽어내려가며 몇 차례 곱씹기를 되풀이한 원고가 또 하나 있었다. 국가의 버림 속에 끔찍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비극을 담은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의 글이다. “국가가 그곳에 있었다. 작은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유능한 경찰의 손아귀에 국가가 있었고, 아이를 인계한 뒤 성실하게 쌓여가는 공무원의 승진 가산점에 국가가 있었다. ‘갱생’을 외치면서 아이들의 월급을 착복하는 사회사업가의 금고 안에 국가가 있었고,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 사람들의 태연한 일상 속에 국가가 있었다.” 지난 10월6일, 사고 당시 현장 구조를 지휘한 해경 123경비정 경장과 해경 수뇌부 일부의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국가기관의 책임을 온전히 비켜간 대검찰청의 꼬리자르기식 세월호 수사 결과 발표 직후라 그 여운이 더 진하게 남았던 모양이다. 잊을 수 없는 4월16일 사고 당일 그 어디에서도, 수사 결과 발표문 그 어디에서도 좀체 보이지 않던 국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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