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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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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짓기의 전략

등록 2014-07-02 15:57 수정 2020-05-03 04:27

‘내가 왜 친일이냐?’ 사퇴하는 날까지도 ‘미천한’ 여론과 언론인 ‘후배’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연거푸 그리 항변하는 데는 나름 곡절이 있지 않을까. 문제로 지목된 강연 동영상과 칼럼들을 인내심의 바닥을 긁으며 살펴보니, 진심으로 그가 억울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자기 신념과 어긋나는 이름으로 공격받는 일은 속을 뒤집어놓는 법이니까.

숨겨진 ‘제국의 남성성’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문창극에 대한 비판은 ‘친일’이라기보다는 ‘친미’ 식민사관으로 개념화됐어야 마땅했다. 한 교회에서의 강연 내내 그는 하나님의 나라인 미국과 그 나라 선교사들을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조선민족의 구원자로 추앙한다. 스스로도 켕겼는지 친미로 해석하지 말아달라 선수를 치기도 한다. ‘이제 살 만해졌으니 위안부 문제는 우리 힘으로 해결하자’고 말한 것 역시 ‘친일’보다는 ‘반(反)여성적 실리주의’에 가까워 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배상’ 요구는 전쟁범죄이자 여성에 대한 폭력임을 분명히 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전범국의 책임을 묻겠다는 맥락에서 제기돼왔다. 그런데 그는 어쩔 수 없이 손해를 입은 사람들을 누가 먹여살릴 것인가라는 한낱 금전적 ‘보상’ 문제로 치환해버린다. 배상을 보상으로, 현재도 진행 중인 고통을 과거의 손해로 바꿔버리는 이 초라한 인식의 밑바탕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단 한 번 짐작해보지도 않은, 그럴 필요조차 느껴보지 못한 ‘제국의 남성성’이 깔려 있다. 그의 사퇴는 마땅했지만, 안타깝게도 잘못된 이름으로 행해졌다. 친일이라는 딱지에 불끈하던 그는 독립유공자의 자손일 수 있다는 추정만으로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며 떠났다. 사태는 요란했으되, 그의 사퇴 국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여성 폭력에 관한 사회인식은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했다.

한번 이름이 잘못 붙여지고 나면, 바로 그 이름 때문에 의도치 않은 효과가 발생한다. 그 효과를 노려 엉뚱한 이름짓기가 기획되기도 한다. 많은 인권침해들도 엉뚱한 이름 탓에 부인되고 용인되고 반복돼왔다. ‘민간인’ 학살을 ‘양민’ 학살로 잘못 이름 붙이는 바람에 보도연맹 사건처럼 빨갱이로 의심받은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숨죽여 지내야 했다. ‘알바생’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 알바라고 부르니 그들의 노동이 마치 임시적·보조적 생계수단인 양 오해가 일어나고, ‘학생·견습생’이라는 말이 따라붙으니 아직 배움의 과정에 있는, 온전하지 못한 노동자라는 인식이 덧입혀졌다. 알바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부당 대우와 모욕은 알바생이라는 명명이 허용한 사회적 효과이기도 하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 참여했던 이들이 상대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라는 지시에 복종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참여자의 35%는 전압이 최고 단계에 이르자 실험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험 자체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실험의 이름은 ‘기억력’에 관한 실험이었고, 참여자들은 ‘교사’ 역할로 초대받았으며, 단어를 외우지 못한 학생에게 ‘벌’로 전기충격을 가하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전압의 세기가 어땠든 전기충격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던 데는 ‘벌’이라는 이름의 효과가 컸을 테다. 며칠 전 서울 강서구의 사립고에서 숙제를 해오지 않은 ‘벌’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수백 차례 반복해야 했던 학생이 근육 괴사로 병원에 입원한 사건이 있었다.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학교 현장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옹호했던 바로 ‘체벌’ 사건이다. 오랫동안 이 체벌이라는 이름 때문에 폭력의 본질이 감추어져왔고, 불가피성이 옹호돼왔다.

‘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사건의 본질로부터 멀찌감치 떼어놓는 이름짓기,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이름짓기는 그래서 위험하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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