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삼척에서는 그동안 원전 유치를 추진하는 김대수 현 시장과 원전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부딪쳐왔다. 2012년에는 시장 주민소환이 추진됐지만, 투표율이 3분의 1에 미달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2013년 12월에는 삼척시의회 차원에서 원전 유치에 관한 주민투표를 발의하려 했지만, 표결 결과 1표가 모자라 무산된 적도 있다.
사실 삼척에서는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반대 여론이 강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삼척시장이 똘똘 뭉쳐 원전을 추진하는 바람에 원전 반대 운동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서 변화의 계기가 마련됐다. 김양호 삼척시장 당선자가 김대수 현 시장을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무소속으로 나온 김양호 당선자는 62.44%를 얻었는데, 제1공약이 원전 백지화였다. 반면 원전 유치를 추진해온 김대수 현 시장은 새누리당 공천까지 받았지만 37.55%를 얻는 데 그쳤다.
반핵으로 드러난 지역 민심이쯤 되면 삼척 시민들의 민심은 원전 반대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동안 중앙정부는 삼척 시민들의 대다수가 원전에 찬성한다고 선전해왔지만, 그 말이 거짓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김양호 삼척시장 당선자는 7월1일 취임과 함께 원전 유치 백지화를 선언할 예정이다. 그러나 ‘원전 마피아’가 장악한 중앙정부가 삼척 원전을 쉽게 포기할 리 없다. 이미 삼척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송전하기 위한 초고압 송전탑 건설 계획까지 추진하고 있는 마당이다. 그래서 7월 이후에 삼척 원전을 둘러싼 논쟁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김양호 당선자와 중앙정부가 부딪칠 것으로 예상되는 또 하나의 쟁점은 주민투표 실시 여부다. 김양호 당선자는 중앙정부가 삼척 원전 백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주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런데 중앙정부나 원전 찬성 세력은 ‘주민투표 불가’ 입장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원전은 국책사업’이므로 주민투표법상 주민투표의 대상이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원전을 유치할지 말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주민투표를 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문제에 대해 주민투표를 한다는 것인가? 게다가 주민투표법이 없는 일본에서도 원전 유치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는 여러 차례 실시됐다. 최초로 실시된 사례는 1996년 니가타현 마키정 주민투표다. 마키정에서는 원전 유치에 대해 찬성 7904표, 반대 1만2478표가 나와 원전 건설 계획이 백지화됐다. 이후에도 미에현 미야마정에서 원전 건설 관련 주민투표가 실시됐고, 역시 반대표가 더 많이 나와 원전 건설 계획이 백지화됐다. 일본에서 실시된 이 주민투표들은 법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주민투표 결과가 법적 강제력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중앙정부와 전력회사는 주민들의 뜻을 존중해 원전 건설을 백지화했던 것이다.
주민투표법 없는 일본도 하는데대한민국은 2003년에 제정된 주민투표법이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법도 없는 일본에서는 원전 건설에 대해 주민투표를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왜 안 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노무현 정부 시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주민참여를 확대한다는 취지에서 주민투표법 제정을 추진했다. 문제는 법을 제정한다는 방침만 정부 차원에서 정했을 뿐, 세부적인 내용은 관료들에게 맡겼다는 데 있다.
주민투표법 제정을 추진하던 관료들은 원전이나 핵폐기장 같은 국책사업에 대해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더구나 주민투표법 제정이 추진되던 2003년 여름에는 전북 부안에서 핵폐기장 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관료들은 ‘국가정책’에 관해서는 주민, 지방의회, 지방자치단체장 어느 누구도 주민투표를 발의하지 못하도록 법 조항을 만들었다. 국가정책에 대해서는 중앙정부 장관의 요구가 있어야만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원전이나 핵폐기장이 우리 지역에 들어오느냐 아니냐는 지역주민들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이런 문제에 주민투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민투표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꼴이었다.
당시 시민단체는 ‘이런 식으로 주민투표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문제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민참여를 보장한다면서 실제로는 주민참여를 봉쇄하려는 기묘한 주민투표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엉터리로 만들어진 법을 근거로 지금은 삼척 원전에 대한 주민투표를 막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투표법을 엉터리로 만든 관료들도 놓친 점이 있다. 주민투표법이 엉터리면, 주민투표법에 의하지 않고 ‘사실상의 주민투표’를 하는 방법도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나 주민들의 자치조직은 늘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의견을 수렴하는 방법 중 하나로 투표를 하는 것은 자유다. 이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일본에서도 주민투표 조례 제정이 안 될 경우 주민들이 스스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주민투표’를 실시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민투표법 제정 이후 ‘사실상의 주민투표’를 한 사례가 있다. 2007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유치 찬반에 관해 마을 주민들이 자체 주민투표를 한 적이 있다. 또한 2007년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서는 쓰레기 소각장 공동 이용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다.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이상 시장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전 유치에 대한 삼척 시민들의 의견 분포를 조사하기 위해 투표 형식을 빌리는 것은 시장의 고유 권한이다. 중앙정부가 삼척 원전에 대한 주민투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장이 직권으로 투표 형식을 빌려 주민들의 의견을 조사하면 된다. 이는 중앙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직권으로 투표 형식 의견 조사 가능정말 문제인 것은, 민주적인 의견 수렴 과정 없이 원전 확대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중앙정부의 권위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이다. 이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미 23개나 있는 원전을 41개까지 늘리겠다는 원전 확대 계획에 대해 건강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삼척 원전을 포함한 원전 확대 정책을 재검토하는 것만이 불필요한 갈등을 예방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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