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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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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코뮌 다시 세우자”

돈이 내부서 도는 자급경제공동체 꿈꾸는 ‘옥천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 황민호 대표
“사회적 경제 통해 실종된 지역사회 복원 목표”
등록 2014-02-27 14:51 수정 2020-05-03 04:27
정용일

정용일

여기저기가 꽉 막혀 있는 듯 갑갑한 요즈음입니다. 정치는 황폐해졌고 시민단체들도 기운을 잃은 듯합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나 황무지를 지나는 듯한 느낌을 맛볼 때가 많다는 호소가 주위에서 자주 들립니다. 하지만 순환하고 변화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어딘가에서 새싹은 움트고 있겠지요. 그 싹을 보려고 충북 옥천을 찾아갔습니다. ‘옥천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라는 긴 이름의 단체가 지난겨울 출범했습니다. 갓 태어난 이 단체의 황민호 대표는 2002년 에 입사해 기자로 일한 이래 지금까지 영농조합 활동을 벌이며 줄곧 옥천에서 살아왔습니다.

“국가와 시장만 있고 지역사회 없어”

-‘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란 게 뭔가요.

=몇 년 전부터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이 생겨나고 있죠. 옥천에도 옥천살림영농조합이나 장애인 자활센터 ‘자연당’, 청소업체 ‘새로이크린’, ‘새로이건축’ 등 여러 사회적 기업이 생겼습니다. 대개는 사회적 기업들이 모여 협의회를 만들고 지원이나 활동 방안을 논의하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역의 사회적 경제를 만들자, 즉 순환경제, 지역의 돈이 내부에서 순환되는 자급경제 공동체를 만든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순환경제와 공동체, 두 가지를 연결해주는 연결망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하나는 순환경제예요. 옥천에선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민들조차 옥천에서 나는 물산을 다 구매하는 게 아니에요. 단작 농사를 주로 하니까 농산물을 그냥 공판장에 넘기고 따로 사먹거든요. 게다가 이곳에도 2∼3년 전부터 편의점이나 이름만 들어도 아는 커피점·빵집 프랜차이즈가 들어와요. 그곳은 수입 재료로 빵을 만드니까 결국 돈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거죠. 만약 빵을 만드는 옥천의 장애인 자활센터에서 옥천에서 재배한 우리밀을 구매한다면 옥천의 밀농사와 장애인 자활에 모두 도움이 되죠. 환경에 이로운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두 번째는 공동체라는 거네요.

=순환경제라는 단어를 빼면 공동체 네트워크가 되죠. 사회적 기업의 기반으로 당연히 지역과 사회가 있어야 해요. 저희의 목표는 옥천의 사회 생태계에서 비어 있는 곳을 찾아 새로운 사업을 열어주면서 순환과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옥천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싶으면 자원봉사센터랑 연결해주고. 잠시 쉬다가 재취업을 하고 싶으면 취업센터에 가입하면 되죠. 지금까지는 개별적인 활동으로 이뤄졌는데, 공동체 개념으로 하나로 묶어내는 거죠.

-사회적 기업 네트워크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사회적 기업이나 벤처기업이나 다 똑같이 생각하고 있죠.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그걸로 기업을 만들어서 정부 지원을 받고 안 되면 망한다는 의미에서요. 벤처기업과 달리 사회적 기업은 지역사회라는 기반에서 나올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주민들 사이에서 공론화를 통해 확인되고 이걸 만들면 우리가 이용해주겠다는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정부 지원이나 활동 정보를 공유하는 걸 넘어서는 거죠.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그런 공론화와 합의를 이끌어내서 만들자는 거예요. 예를 들어 로컬푸드운동(지역 농산물 이용하기)이 필요하다, 누가 이렇게 제안하면 논의를 거쳐 그럼 출자해보자, 이렇게 되는 순서예요.

-누가 주체가 되고 있는지 궁금해요.

=옥천에 있는 사회적 기업뿐 아니라 사회서비스기관, 자원봉사센터, 자활센터, 다문화가정지원센터, 장애인자립지원센터, 취업지원센터, 옥천군 공무원, 지역시장 대표, 대안학교까지 옥천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가 다 모여요. 재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했어요. 서로를 알아가면서 앞으로 뭘 할까 계속 고민하고 준비했죠. 그 결과가 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인데, 이걸 준비하는 데만 3년 가까이 걸렸어요.

-말씀을 듣다보니 네트워크 자체가 하나의 사회 같아요.

=그래서 공동체죠. 순환경제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인데,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코뮌, 즉 우리 곁에 사라진 지역사회를 복원해내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국가와 시장만 있고 지역사회가 실종돼 있어요. 방송에서 시민사회라고 말하는데 정작 그 실체가 없죠. 기껏해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회를 다시 만들어내려고 해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만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모두 사회적 경제 틀 안에 넣으려 해요.

국민주 신문 이 낳은 변화

-지역사회의 실종이라는 말이 무척 가슴에 와닿아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일반인들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 있고요.

=도시는 더욱 그렇고, 농촌도 마찬가지예요. 귀농한다고 하는데, 실제 귀농자들이 돌아온 곳은 지역사회가 실종된 농촌이에요. 그래서 다품종 판매인 꾸러미 사업도 하고 친환경 농산도 하지만, 지역이 아니라 도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거든요. 기껏 귀농해도 자기 기반으로 삼을 지역이 없는 거죠. 옥천살림영농조합도 꾸러미 사업을 해요. 그러나 옥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돈벌이가 아니라 관계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하고 있어요. 옥천에선 한 집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예요. 그런데도 자기 지역 주민들이 만드는 것을 사지 않았거든요. 꾸러미에 옥천에서 나는 사과도 담고 배도 담고 달걀도 담아주면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다 알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관계가 형성되죠.

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닙니다. 에도 그 이름이 몇 차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하는 옥천에서 오늘날 이와 같은 실험에까지 이른 역사가 궁금해집니다.

-옥천에서 이런 움직임이 가능했던 이유라면 뭘 찾을 수 있을까요.

=옥천은 다른 농촌 지역과 비슷해요. 특별한 역사가 없었어요. 대한민국에서 표준적인 사람들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굳이 뭐가 달랐을까 한다면 1989년 의 탄생을 꼽고 싶어요. 은 주민 222명이 출자해서 만든 국민주 신문입니다. 가 만들어진 그 다음해죠. 초대 발행인이 송건호 선생님인데 그분 고향이 옥천이에요. 지금도 유료 독자 수가 4천 명가량이니, 옥천의 가구 수가 2만인데 주민 20%가 을 본다는 거죠. 25년의 역사 속에서 그야말로 옥천 주민들의 말이 되었어요.

-신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 1년 뒤에 옥천군 농민회가 생겼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활동으로 2000년대 초반에는 지역연대 활동까지 이루었고 그 결과가 농업발전위원회 설립으로 이어졌어요. 농민들이 농정에 참여시켜달라고 요구하면서 5년간 옥천군을 상대로 싸워나갔어요. 결국 농민들이 참여하는 ‘옥천군 농업발전위원회 조례’가 제정됐는데, 다른 지역에 없는 조례예요. 이 두 방향에서 지역 자치의 큰 흐름이 이어져왔어요.

의 창간 이후 25년간 옥천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중 안남면 배바우 마을에서 시작된 주민자치운동은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발전을 의논하는 주민평의회인 지역발전위원회를 만들어냈고, 도서관과 어머니학교 등 문화운동으로, 안남면을 넘어 대청호 상류보호운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해보자는 옥천살림영농조합의 활동도 그중 하나입니다.

“순환경제공동체 만드는 중심은 농민”

-옥천살림영농조합은 농촌 지역이라서 더 잘 운영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을 때 옥천군도 조례를 만들었지만 학생 수가 7천 명밖에 안 되니까 농협이 안 하겠다고 했어요. 농민들이 고민했죠. 그러면 우리가 해보자 해서 만들어진 것이 옥천살림영농조합이에요. 2008년에 시작했는데 여기도 농촌 지역이지만 제공할 품목이 쌀 하나밖에 없었어요. 단일품종 대량생산 체계이다보니 지역 농업 체계가 다양성이 없는 거죠. 그래서 시작해놓고도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친환경 쌀로 시작해서 양파와 감자로 품목을 늘려나갔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22개 품목으로 늘어났어요. 콩을 생산하는 옥천이 대기업이 만든 두부를 사서 급식으로 제공해온 거죠. 우리가 두부공장을 세워 학교 급식으로 제공하는 데 1년이나 걸렸어요.

-농민들의 노력으로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군요.

=농민들이 직접 움직여서 이뤄낸 로컬푸드운동은 전국에서 몇 개 없을 거라고 자부해요. 지금까지 농민들의 힘으로 ‘농업발전조례’ ‘학교급식조례’ ‘옥천푸드지원조례’를 만들었어요. 옥천푸드지원조례는 학교를 넘어서 옥천 주민들이 먹는 모든 농산물에 예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지금은 로컬푸드운동 덕으로 전체 물품의 20% 정도를 옥천산으로 조달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다양한 품목을 지으려고 해요. 옥천살림영농조합이 운영 주체이기는 하지만, 순환경제공동체를 만드는 중심 세력은 결국 농민들 자신이죠.

-다시 공동체네트워크로 돌아가서 올해 준비하는 사업은 무엇인가요.

=기획, 홍보, 공동체 활성화, 지역사회 공헌, 이렇게 4개 분과가 있어요. 기획 분과는 지역자원을 조사해서 옥천의 이야기를 축적하자는 기획을 했어요. 의논 끝에 ‘옥천 아는 사람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지역사업 컨설팅을 외부 사람이 아닌 정말로 옥천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맡아서 하자는 거죠. 그리고 지역 소식지를 3월부터 발행하려고 해요. ‘옥천사람들더하기’로 이름을 지었어요. 공동체 활성화 분과는 필요한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고요, 지역사회 분과는 지금 옥천에 벼룩시장이 없어서 이걸 만들어내는 것을 사업으로 잡고 있어요.

-그야말로 비어 있는 곳을 채워주는 역할이군요.

=그렇죠. 서로 모여서 막 토론하다가 누군가 이게 필요하다, 이렇게 제안해요. 그러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더 넓히고 이것을 기존 단체들과 연계해주는 일을 네트워크가 해주는 거지요.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나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농민회나 단체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열심히 해오셨죠. 그러나 앞으로 더 밑바닥으로, 더 귀퉁이로 가야죠. 옥천군에 월 100만원 미만 소득자가 3분의 1이 넘어요. 저도 옥천살림영농조합에서 배달 서비스를 하면서 기초생활수급자나 독거노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때서야 ‘아, 정말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죠. 지금 우리 사회는 만남 자체가 계층화돼 있어요.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일반 대중과는 물과 기름처럼 떠 있죠. 진정한 지역사회를 건설하려면 좀더 아래로 내려가서 공동체를 엮어야 해요. 다문화가정지원센터를 자원봉사자와 복지센터와 연결하고 그걸 다시 공동체 내 다른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즉 지역사회의 비어 있는 곳을 찾아서 연결망을 촘촘히 만들려고 해요. 그걸 위해 제일 먼저 옥천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망라해 조사해보는 일종의 네트워크 지도를 그려볼까 합니다.

“지역사회 주인 돼 좋은 정치 만들어야”

옥천에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역사회운동과 정치의 관계가 궁금해집니다.

-정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여전히 집권 여당이 기반을 잡고 있어요. 좋은 정치가 가능한 상황이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좋은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가 뭔가를 한꺼번에 확 다 바꿔줄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살아왔어요. 뛰어난 정치인이 시민사회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정치인이 나오지 않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지역사회가 주인이 되어 정치를 규정하고, 그래서 끝내 좋은 정치인을 배출해내는 데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더 이상 초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지역사회를 건설해 정치를 끝내 바꾼다는 황민호 대표의 생각에 전율합니다. 그러나 익명의 개인들로 가득한 대도시에서도 그런 실험이 가능할지 의문이 듭니다.

-도시에서도 공동체 운동이 가능할까요.

=쉬운 일은 아니에요. 너무 크고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얽혀 있는 것도 문제지만, 서울을 놓고 보면 중앙정치, 체계정치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자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만 생각하지 서울시민이라는 생각은 약해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풀뿌리나 생활민주주의가 아니죠. 힘들어도 지역 단위의 공론장을 만들어내야 해요. 더불어 우리나라 기초지방자치단체 평균 인구가 20만 명입니다. 이게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커요.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은 기초 커뮤니티가 5천∼1만 명이에요. 분권과 자치를 한 단계 더 낮출 필요가 있어요.

-저는 서울 사람인데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자기 삶터의 공론장에 적극 참여해야죠. 폐쇄적이고 이해관계가 맞는 결사체가 아니라 공동체로요. 그 공동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없다면 그건 대안이 아니에요. 마을에서 저마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 언론을 만드는 것을 권하고 싶어요.

-옥천이 궁극적으로 가려는 단계는 어딘가요.

=궁극적으로 꿈꾸는 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우리 지역사회가 학교가 되는 거예요. 한 청년이 옥천에서 자라나 옥천살림영농조합에서 농업을 배우고 대청호주민연대에서 환경을 배우는 거죠. 지역에서 공부하고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예요.

공동체 가꾸어온 주민들이 주인공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옥천이 걸어온 길에 누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황 대표는 서슴없이 지역 주민들이 있었다고 답합니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헌신적인 지도자, 현장에 충실한 지역 언론, 주민자치운동의 성공과 확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꾸준히 조금씩 깨우쳐가며 공동체를 가꾸어온 주민들이 그 주인공이라고. 비록 더디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궈온 옥천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확인해봅니다. 다가오는 봄에는 좀더 큰 희망의 싹이 움터오는 걸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연순 변호사, 녹취 구민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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