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1990년대 초반 동성애인권운동이 시작됐다고 얘기한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알고 있고, 많은 글에서 1990년대 초반 레즈비언과 게이가 모여 인권운동을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틀린 내용은 아니라고 해도 정확한 내용도 아니다. 즉, 1990년대 초반 시작했다고 알려진 운동은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양성애,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이다. 당시 운동에 함께한 사람 중엔 동성애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레즈비언과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가 모여 함께 운동을 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초반 시작했다고 하는 운동은 LGBT 인권운동의 역사이며, LGBT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한 시간이었다. 이것을 동성애자만의 역사로, 동성애자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건으로 설명하는 건 그 시기에 함께한 바이와 트랜스젠더를 은폐하고 배제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달리 말하면, 성적소수자나 LGBT란 말에 한두 명의 유명 게이 연예인을 떠올리고선 LGBT를 떠올렸다고 인식한다면 이것은 레즈비언, 바이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방식에 공모함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1990년대 시작된 LGBT 운동</font></font>1996년, LGBT가 통신 모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던 그 시기에, ‘아니마’라는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를 위한 모임이 생겼다.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가 독자적 운동 혹은 모임을 형성한 중요한 순간이다. ‘아니마’가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를 위한 인권운동의 성격을 지녔다고 해도, 모임에서 단체로 형태를 달리한 운동이 등장하는 데엔 얼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 트랜스젠더 관련 이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예인 하리수씨가 2001년 방송에 등장했고, 이것은 한국 사회를 흔든 중요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2006년까지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은 트랜스젠더를 단체명으로 내세우지는 않은 단체에서 진행됐다.
2005년 말, 몇 명의 ftm(female-to-male)/트랜스남성이 모여 트랜스젠더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를 만들자고 논의했다. 이 논의는 2006년 본격적으로 진행한 ‘성전환자 인권실태 조사 기획단’과 연결됐고, 기획단은 한국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삶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제626호 표지이야기 ‘시련은 중학교부터 시작된다’ 참조). 이와 함께 그 몇 명의 ftm은 2006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이슈를 주제로 한 행사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많은 트랜스젠더와 얘기를 나누며 단체 설립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단체를 만들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했던 그들은 그해 여름, 다른 여러 트랜스젠더에게 단체 설립을 함께하자고 본격 제안했다. ftm/트랜스남성과 mtf(male-to-female)/트랜스여성이 모여 함께 설립한 그 단체가 바로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발족 당시 명칭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이하 지렁이)다. 2006년 11월에 정식 발족한 지렁이는 몇 년의 활동을 끝으로 2010년 초 정식 해소됐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활동했지만 지렁이 활동은 적어도 중요한 인권 이슈 두 가지를 제기했다. 첫째, 사람들, 특히 인권활동가들이 트랜스젠더를 인식하도록 했다. 지렁이 활동가는 LGBT가 모인 자리에서 동성애자만 있는 것처럼 얘기하거나, 인권운동에서 트랜스젠더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 태도에 문제제기를 했다. 인권운동의 주요 의제인 트랜스젠더 이슈를 누락하는 태도에 항의하며 언제나 트랜스젠더 이슈를 ‘함께’ 사유할 것을 요구했다. 둘째, 여/남으로 구별된 화장실을 트랜스젠더가 사용하기 힘들고, 인간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방식과 이런 사고방식이 트랜스젠더를 존재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은 이후 여러 인권단체에서 1인화장실(한 개의 화장실을 젠더와 장애 구분 없이 한 명이 사용하는 방식)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트랜스젠더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font></font>하지만 지렁이는 해소됐고 지렁이 활동가는 개인으로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 개인 활동가를 모르는 이상 트랜스젠더 이슈로 누구에게 문의나 상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트랜스젠더 이슈는 지렁이 발족 이전처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이하 센터)나 다른 동성애단체에서 담당했다. 초반엔 각 단체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로 상담하는 것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담을 원하는 사람이 늘었다. 아울러 트랜스젠더 이슈에 전문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사건이 계속 등장했다. 결국 센터는 트랜스젠더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단, 무작정 단체 설립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러 트랜스젠더와 인터뷰하며 개개인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가고, 주변 사람이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하고,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 및 출판물을 수집하는 등 총 3년의 준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재단의 기금으로 센터가 2013년 초부터 진행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란 프로젝트다.
하리수씨나 최한빛씨 등 몇 명의 트랜스젠더 연예인이 방송에 등장하면서 대중에게 트랜스젠더가 익숙한 듯하지만, 트랜스젠더는 늘 막연한 이미지로 존재할 뿐 트랜스젠더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트랜스젠더 개개인도 트랜스젠더 네트워크와 인권단체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있다. 3년 뒤 단체 설립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조각보 프로젝트는 트랜스젠더 사이의,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 사이의 이음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지난 1년간의 성과를 토대로 12월에 조각보 홈페이지(www.transgender.or.kr)를 열었다. 다양한 트랜스젠더의 삶을 담은 인터뷰,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여러 출판물 등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다면, 적어도 조각보 홈페이지엔 들러야 한다. 조각보 홈페이지에 트랜스젠더의 모든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뭔가를 알고 싶다면 최소한 조각보 홈페이지에 방문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 LGBT 운동이 게이남성 중심이자 서울 중심이란 한계는 여전하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단체 및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LGBT 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비온뒤무지개재단’(www.rainbowfoundation.co.kr)이다. ‘남성동성애, 서울 지역 그리고 단체’ 중심이 아닌,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모두’가 함께하는 운동을 지향하거나 지지한다면 재단 홈페이지에 방문해 창립 회원이 되거나 정기 후원을 하면 어떨까?
<font size="4"><font color="#C21A8D">가장 적극적인 방법, 후원</font></font>후원이 지지와 응원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후원은 지지와 응원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며 ‘내’가 원하는 세상을 이루는 데 동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여러 측면에서 어렵다고 말하는 지금 이 시대에 ‘소수자’ 운동의 위기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운동이 부상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좋겠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runtoruin@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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