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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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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다씨 삶에 감전된 사람들

‘난민 기획’이 만들어낸 작지만 깊은 울림… “양심 지킨 대가로 또 다른 섬에 갇힐 제2의 예다씨 안 나와야”
등록 2013-11-07 17:5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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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신청이 거부돼 가족과 함께 코소보로 강제 송환된 여중생 이야기로 프랑스 사회가 떠들썩한 와중에 한국인 난민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서 온몸이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난 10월23일, 프랑스에 살고 있는 목수정 작가가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기획 연재 ‘국민과 난민 사이’ 마지막 회 기사 ‘한국인 예다씨, 왜 무국적 난민을 택했나’(983호·사진)를 본 소감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이 된 이예다씨와 만나고 싶다 했다. “그 청년의 사연을 알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비겁자’라며 그를 비난하는 입장이라고 들었다. 자신의 양심을 지킨 대가로 그런 비난을 접하며 또 다른 섬에 갇히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주변 친구들은 오히려 그를 용감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지속적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그는 용감한 사람, 응원하고 싶다”

목 작가는 얼마 전에 만난 한 프랑스 청년을 떠올렸다. 청년의 아버지는 1970년대 대체복무마저 거부한, 프랑스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다. “반전주의자들이 모여 청년의 아버지를 도왔고, 여론이 움직여 결국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유를 얻었다. 프랑스는 15년 전부터 모병제로 전환됐다. 이곳에 용병으로 오는 한국인도 가끔 본다. 내가 남자였다 해도 군대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군대를 없앨 수 없다면 모병제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국외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한국인 가운데 예다씨처럼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일까. 기사가 나간 뒤 한국인 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다. 기사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10월22일 오후엔, 10여 통의 전자우편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비난이나 항의글일 것이란 짐작과 달리, 한 통의 전자우편을 제외한 대다수는 청년의 선택에 공감한다거나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현재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방문교수로 머물고 있다는 장지욱씨는 ‘입장을 깊게 이해한다’며 예다씨와 연이 닿기를 희망했다. 1980년대 말 청년 시절 낯선 프랑스에 도착해 20여 년간 생활하며 겪은 일들은, 이곳에서 앞으로 적응해가야 할 청년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이우성 목사도 자신의 연락처와 함께 ‘혹시 내가 도움이나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예다씨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1999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청년을 가르쳤다는 이지영 선생님은 기사를 본 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교단에 선 첫해에 만난 첫 제자였다. “나와는 삶의 방향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 넓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랐을 때쯤엔 예다와 같은 문제로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포털 사이트 댓글란 점령한 군사주의

포털 사이트 댓글란의 반응은 기자의 전자우편함에 들어온 의견들과는 사뭇 달랐다. 기사에는 9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휴전 중인 나라에서, 국방의 의무를 강제하는 건 당연하다. 병역 회피자일 뿐’이라는 비난이 다수였다. ‘국가의 평화가 있어야 개인의 자유도 보장된다’는 주장도 여러 번 등장했다. 소수였지만 ‘자신의 신념이야말로 존재의 이유다. 이런 나라가 되라고 힘들게 군 생활을 한 게 아니다. 대체복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는 한국 속 난민인정자 실태조사 결과를 전한 980호 ‘난민들의 한국살이’를 시작으로 총 4회 연재된 ‘국민과 난민 사이’ 기사 일부를 페이스북 등을 통해 공유하고 있다. UNHCR 관계자는 “국내 거주 난민들의 상황을 알리고 난민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데 유용할 것 같다”며 “기사 일부를 발췌해 정기간행물 제작 등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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