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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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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성의 속물화

등록 2013-07-16 14:46 수정 2020-05-03 04:27

한국 사회에서 30대, 특히 싱글 여성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리버럴한 세대다. 발랄한 상상력과 에너지로 2008년 촛불집회에도 적극적이었던 이 ‘배운 녀자’들은 지난 대선 공간에서도 변화에 가장 목말라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열려 있다는 것인데, 자신은 물론 사회를 향해서도 활짝 열려 있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강연회·강좌는 물론 공연 관람, 도서 구입 등 문화의 핵심 소비층도 30대 싱글 여성들이다. 제주 올레길을 걷다보면, 좀 과장하건대 길을 걷는 사람 2명 중 1명은 30대 싱글 여성이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회와 소통하고, 소박한 변화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공짜 밥은 불안해서 싫다”는 30대 엄마들

그런데 이렇게 열려 있고 소통과 공감을 통한 변화에 익숙한 30대 여성들이지만, 막상 결혼해서 애를 낳고 나면 내 아이에만 집중하는 이기적 모습으로 변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내 아이는 특별하고 달라야 한다며 유치원에서부터 교육열(!)을 뜨겁게 불태운다. 물론 이들만 유독 그런 건 아닐 터. 하지만 이전 세대와 비교해 훨씬 열려 있다고 믿었던 30대 여성들조차 이러한 악순환에서 자유롭기는커녕 오히려 더 몰입하고 있는 듯하다.

무상급식에 대한 태도는 이들의 이중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필자는 무상급식이 한창 이슈가 되던 2010년부터 30대 주부들을 대상으로 몇 차례 좌담회를 개최할 기회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참석자의 다수가 무상급식에 반대했다.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이 2010년부터 2012년에 이르는 정치 국면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할 때 의외의 사실이었다. 이 문제가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여서는 안 된다는 상식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던 상황에서 그렇게 ‘쿨’하게 보였던 30대 여성들이 반대했다니 말이다. 반대 이유는 단순했다. 무상급식의 질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귀한 내 아이에게 불안한 밥을 먹일 수 없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막상 정치적 견해에서는 상당수 진보적이었고 복지 일반에도 관심이 높았다는 점이다.

30대 여성이 지니는 이중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내 자식 문제에서만은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문제를 말이다. 결혼, 출산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속물화’ ‘보수화’되는 연령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엔 석연치 않다. 과도한 경쟁, 단 한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환경, 국가가 아닌 가족이 아이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에서 이들의 ‘이기적’ 행위는 ‘종족 본능’의 차원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30대 여성의 ‘내 자식’ 보호 본능이 ‘내 가족’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사회와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2012년 2월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조사에서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는지’를 질문했을 때, 30대 남성은 53%가 긍정적으로 답변한 데 비해 30대 여성은 부정적 답변이 58.7%에 이르렀다. 물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30대 여성들이 자식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세금 납부 같은 사회적 의무를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복지국가 스웨덴에서는 1930년대 주택난과 양육의 어려움으로 인해 인구 감소 문제가 발생하자 출산·양육·교육 등 개인의 생애주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방식으로 이를 돌파했다 이른바 ‘국민의 집’ 노선인데, 이는 지금까지 스웨덴 복지의 근간이 돼왔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가의 역할은 매우 미비하고 가족이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주부 여성의 시선이 사회로 확장되지 못하고 ‘종족 본능’을 위해 가족 내로 갇히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30대 여성의 속물화에 대해 이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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