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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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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네 머리 위로 송전선로를

등록 2013-06-01 18:35 수정 2020-05-03 04:27

새로 이사한 사무실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자 달궈진 옥상은 좁은 사무실의 온도를 한정 없이 올리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없어 더위를 어떻게 피해갈지 설왕설래 중이다. 여름 한철 참아보자는 의견과 벌써 이렇게 더운데 무리를 해서라도 에어컨을 구입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동료 한 명이 말한다. “더우면 밀양을 생각해.” 에어컨 구입을 강력히 주장하던 내 입은 36.5℃ 밑으로 급속히 냉각됐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더워? 그럴 땐 밀양을 생각해”

요 며칠 경남 밀양에서 들리는 소식이 불편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한국전력이 신고리 북경남 765kV 송전선로 공사를 재개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밀양은 전쟁터다.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할머니들이 알몸으로 저항하는 사진이 보도됐다. 구급차에 실린 할머니들의 나이는 76살, 73살, 78살, 86살이었다. 한전 직원은 물론이거니와 경찰조차 주민 편일 리 없다, 뻔하다. 할머니들이 다치고 있다. 아마 몸만큼 마음도 다치고 계시리라. 송전탑 건설은 전력난에 대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라고 한전은 말한다. 지난해 여름의 전력난을 생각해보니 제법 국민도 설득당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 전력난을 입에 올리며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전기로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력난은 재앙의 전조와 같다.

이런 공포에 대해 할머니 한 분이 정답을 말해줬다. “서울에 핵발전소 짓고, 송전탑도 지어라. 왜 밀양에서 이러느냐.” 촛불집회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번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가, 말이다. 더위를 참을 수 없어 에어컨을 달지 않고 어떻게 여름을 보내겠느냐고 침을 튀기는 나는? 당장 눈앞의 편리함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타인의 비명을 듣지 못한 나는? 놀랍고도 신기한 세상을 제공하는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가 백혈병과 희귀 질병에 걸려 죽어도 손안의 스마트폰을 포기하지 않는 나는? 석유전쟁으로 아스피린이 없어 죽어간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뻔히 알면서도 보일러 온도를 낮추지 않았던 나는? 서울 강남에 원전이나 송전탑을 지을 리 없는 정치인들,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을 무시하는 삼성의 이건희, ‘이권전쟁’을 정의로 포장한 미국의 제국주의자들…. 그들과 나는 정말 다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며 부당함에 부역하고 있지 않는가.

품위는 돈 따위로 보상할 수 없다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알몸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노인들의 절규가 들린다. 밀양은 에어컨, 스마트폰, 냉장고와 컴퓨터, 보일러와 자동차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내 삶을 마주하게 했다. 할머니들은 편리함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묵인한 양심의 맨몸뚱이를 보게 해주었다. 그러한 모든 것이 한전과 정치인들의 야만과 폭력을 가능케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도시에서 소비한다면 도시의 내 집 앞에 송전탑을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많이 소비하고 이토록 편리한 세상을 누릴 자격이 나한테는 없다. 천주교와 반핵세력이 주민들을 세뇌했다고 말한 한전 부사장에게도 일러줄 말이 있다. 당신이나 나의 파렴치함이 세상을 망쳤다면, 지금 할머니들은 돈 따위로 보상할 수 없는 인간다움과 품위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중이라고. 뭐,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쉽게 말해줘야겠다. “해 떨어지면 주무시는 할머니들 괴롭히지 말고, 전기 많이 쓰는 당신 머리 위에 송전선로를.”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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