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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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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더 아픈 사람들

돈 몇 푼이 없어 엑스레이 못 찍던 사람들 앓느라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붕대 감아주고파
등록 2013-05-20 13:48 수정 2020-05-03 04:27

“이 가방은 뭐고?”
“받았나? 그기 오리지널 완전 똑같다 해서 보세집에서 15만원 주고 안 샀나.”
“엄마 땜에 미치겠다. 15만원이나 줬다고? 뭐한다고 그래 쓸데없는 돈을 쓰노? 그 돈 있으면 디스크 치료나 받지 뭐한다고.”
“쓸데없기는! 우리 딸이 첫 월급 탔는데 그까짓 가방 하나 못 살끼가?”
드라마 속 엄마와 딸의 전화 통화다. 엄마는 서울에서 계약직으로 취직한 딸내미에게 짝퉁 가방을 사보내는 게 디스크 치료보다 더 중요하고 급했다. 15만원이라는 금전의 가치는 짝퉁 가방이 될 수도 있고, 약간의 디스크 치료가 될 수도 있다.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이기도 하고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마음이기도 하다.

병원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지원·후원프로그램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한 공공병원 입원실에 환자가 앉아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병원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지원·후원프로그램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한 공공병원 입원실에 환자가 앉아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1995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일할 때다. 하루는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을 데리고 왔다. 딸은 나무에서 떨어져 다쳤다는데 한쪽 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골절이 예측됐지만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어느 방향으로 뼈를 맞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아버지에게는 엑스레이 찍을 돈이 없었다. 차비도 없어 아침부터 몇 시간을 뙤약볕 속에 먼지 풀풀 날리는 황톳길을 걸어왔다고 했다. 스코틀랜드 거점의 어느 의료봉사단체에서 운영하는 자선병원이라 의료비가 저렴했지만 무조건 무료는 아니었다. 따로 지원을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를 받으려면 시일이 걸렸다. 엑스레이 비용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보니 600원 정도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신 돈을 내주고 엑스레이를 찍게 했다. 현상된 엑스레이 필름은 형광등이 아니라 햇빛에 비춰 봐야했다. 그러고는 바로 뼈를 맞췄다.

2013년 서울, 한 70대 남자가 계단에서 내려오다 넘어져 굴러서 척추를 다쳤다. 가까이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압박골절이 있다는 진단까지 받았는데 막상 입원 수속을 하다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것이 드러나자 “다른 병원가보세요!”라며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와서 하소연을 한다.

한 50대 남자는 의료보험을 적용해 본인 부담금이 1만5천원 정도인 치료가 있는데, 수중에 돈이 7천원밖에 없다고 돈 생기면 다음에 와서 치료받겠다고 하고는 그냥 가기도 한다. 병원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지원·후원 프로그램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어느 60대 여자는 팔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정밀검사를 받은 뒤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권하는 신경 길 넓히는 시술을 받았는데 별 호전이 없었다. 다른 병원에 가보았더니 또 다른 정밀검사를 하고 ‘어깨 회전근개 부분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충격파 치료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팔은 여전히 아팠다. 또 다른 병원에 갔는데 이번엔 팔꿈치 관절에 관절염이 있다고 해서 줄기세포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도 별다른 효과를 못 보았다. 그렇게 쓴 돈이 수백만원이라는데, 돈이 아까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얼마 전 뉴스에는 국회 출석에 불응한 대기업 대표들에게 벌금으로 1천만원 혹은 1500만원이 선고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재판부는 재산이 많은 피고인에게 벌금 액수가 크지 않아 가볍게 생각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사람마다 금전의 척도와 용도는 참 다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노동을 하고 있다. 그나마 노동을 하고 있으면 다행인데, 일거리를 못찾거나 병들어 노동을 할 만한 신체적·정신적 조건이 못 되는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어떤 사람은 몸을 너무 많이 쓰다보니 닳아서 생기는 병을 앓고, 또 어떤 사람은 몸을 너무 안 쓰다보니 굳어져서 생기는 병을 앓는다. 그들 모두의 앓느라 지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따뜻하게 붕대를 감아주고 싶다.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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