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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천m 파서 따뜻하면 온천?

지하 깊숙이 파서 25℃ 이상이면 온천이라는 온천법, 난개발만 조장해… 몇천m 아래 지하수에 대해서도 땅의 주인은 배타적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
등록 2013-05-20 13:45 수정 2020-05-03 04:27

지난 3월 지리산생명연대 최화연 사무처장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전북 남원 산내면에 있는 실상사 앞 마을에 온천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업자가 굴착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네가 지리산 자락의 조용한 동네인걸 알기에 “갑자기 그 동네에 웬 온천이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온천법상 지하 깊숙이 파서 25℃ 이상의 물만 나오면 ‘온천’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약간 어이가 없어서, 업자가 얼마나 깊이 파려고 하는지 물어보니, 무려 지하 1천m까지 파려고 한단다.

실상사 부근의 온천 굴착 현장. 흉물스런 중장비와 어울리지 않게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다. 물이 귀한 지리산 자락에서 하루 300t 이상의 지하수를 뽑아 쓰면 지역 주민들과 환경은 어떻게 될까? 하승수 제공

실상사 부근의 온천 굴착 현장. 흉물스런 중장비와 어울리지 않게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다. 물이 귀한 지리산 자락에서 하루 300t 이상의 지하수를 뽑아 쓰면 지역 주민들과 환경은 어떻게 될까? 하승수 제공

2010년 섭씨 40℃ 이상 물은 21.3%

지하 1천m까지 파서 25℃ 이상의 물만 나오면 온천이라니…. 온천이 없다는 지역에서도 ‘온천’ 간판이 들어서는 걸 보며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있는데, 이제 그 의문이 풀린 셈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온천은 “지구 내부의 열에 의해 땅속에서 평균 이상의 온도로 데워진 물이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외국의 유명한 온천들도 뜨거운 물이 지표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곳이다.

그런데 1981년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온천법은 그렇지 않다. 온천법에 따르면, 지하에서 나오는 섭씨 25℃ 이상의 물은 온천으로 인정된다. 그 물이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땅 밑에서 인위적으로 끌어올려도 온천이 된다. 이쯤 되면 온천법이 말하는 ‘온천’은 우리가 알던 그 온천이 아닌 셈이다. 옛날에 왕이 몸이 안 좋을 때 치료차 갔다던 온천, 피부병 같은 것에 좋다며 찾아가던 온천, 그런 온천이 아닌 것이다.

물론 모든 온천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있던 유명한 온천들은 온천공의 깊이가 비교적 얕다. 그러나 최근 개발된 온천들은 평균 지하 800m 밑까지 파고들어간다.

심지어 1천m, 2천m 지하까지 파고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지표수의 온도가 섭씨 13℃ 정도라고 하고, 지하로 갈수록 100m당 평균 2.5℃ 정도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깊이 땅을 파면 수온이 25℃를 넘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온천’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지하수를 뽑아내서 끓인 ‘지하수 목욕탕’이다. 실제로 2010년 기준으로 전국의 온천공중에서 섭씨 40℃ 이상의 물이 나오는 곳은 21.3%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40℃가 안 되는 미지근한 물을 끓인 온천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지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서 ‘온천’을 개발할까? 그것은 온천으로 인정되면 땅값이 올라가고 개발이 쉽기 때문이다. 온천법은 이런 난개발을 조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온천이 발견돼 온천원 보호구역·지구로 지정되면 지하수법에 따른 지하수보전구역에서 자동 해제되는 구조다. 공익을 위해 지하수를 보전하려고 만들어놓은 지하수보전구역이 땅을 깊이 파서 25℃ 이상의 물만 나오면 해제되는 것이다.

개발 행정절차가 4년에서 6개월로

지금의 온천법은 온천개발업자들의 편의를 위한 법이다. ‘규제 완화’라는 명목으로 개발업자들에게만 좋은 법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반면 지하수를 마구 퍼올려 쓸 경우에 생길 환경오염, 지하수 고갈, 주변 하천에 미칠 영향 등은 고려 대상에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온천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특히 2001∼2005년 매년 평균 30건씩 새로운 ‘온천 아닌 온천’이 발견됐다. 그러면서 2004년에는 온천 개발 면적이 여의도 면적의 21배인 1만7977m²(약 5438만 평)에 달하게 되었다. 2004년 한 해 동안 전국 온천에서 사용한 물은 1억7천만t에 이르렀다.

2010년에 개정된 온천법은 한술 더 떠서 온천 개발에 필요한 행정절차 기간을 4년에서 6개월로 단축해주었다. 개발업자들의 로비가 통했다고 볼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온천을 이런 식으로 사유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지금 개발되는 ‘온천 아닌 온천’은 그냥 땅속 깊이 흐르는 지하수를 뽑아 쓰는 것이다. 이런 지하수는 공공의 자원으로 봐야 한다. 토지를 소유한다고해서 지하 1천m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에 대해서도 배타적 권리를 가진다고 볼 이유는 없다.

지난 5월4일 실상사 부근의 온천 굴착 현장에 가보았다. 굴착 작업은 지역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해서 중단된 상태였다. 최화연 사무처장은 “지금 추진 중인 ‘온천사업’ 속에 토건사업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토지 소유주는 온천법의 조항조차 피하려고 지하수법에 따른 ‘지하수영향조사’를 한다며 불법적으로 굴착을 시도했다고 한다. 남원시청은 이를 묵인했다. 그러다가 지역 주민들이 관련 법규를 찾아보고 중앙부처에 질의해서 위법사실을 밝혀내니까 슬그머니 잘못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지 소유주는 다시 온천법에 따른 굴착 허가 신청을 낸 상태이고, 남원시청은 불법으로 굴착한 부분에 대한 복구 명령도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굴착 현장에는 흉물스러운 중장비와 어울리지 않게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다. 굴착 현장 바로 옆에는 귀농한 주민이 직접 지은 집이 있다. 그 주민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그리고 식수도 모자랄 정도로 물이 귀한 지리산 자락에서 온천을 명목으로 하루 300t 이상의 지하수를 뽑아 쓰면, 지역 주민들과 환경은 어떻게 될까?

귀농하러 갔다가 지킴이가 된

최화연 사무처장은 5월21일까지 남원시청이 굴착 허가를 해줄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굴착 허가가 나면 또다시 지난한 싸움이 시작될지 모른다. 지리산댐에, 케이블카에, 이제 ‘온천 아닌 온천’까지 상대해야 하다니. 귀농하러 내려왔다가 지리산 지킴이가 된 최화연 사무처장의 어깨가 그날따라 무거워 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지켜야지. 포기하기에는 지리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소중하다.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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