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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의 빛나는 존재 이유

민간병원이 결코 할 수 없는 공공병원 역할들 지금의 위기, ‘믿을 수 있는 병원’ 돼주는 기회로
등록 2013-05-05 16:19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김진수 기자

한겨레 김진수 기자

2002년, 미국 뉴욕에서 3년간 근무하고 귀국했을 때 인사차 친한 선배를 찾아 서울대학교병원에 간 적이 있다. 서울 대학로의 정문을 지나 비스듬한 언덕길을 좀 오르니 더블와이(double-Y)라는 병원 본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때마침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경축! 서울대학교병원 세계적인 맥킨지 경영컨설팅 성공적 완료.’

당시 맥킨지가 내놓은 해법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의사들 성과급을 빵빵하게 챙겨줄 것. 둘째, 건강검진센터를 세울 것. 서울대병원은 두 가지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만성 적자에서 벗어났다. 한편 서울시립보라매병원은 최근 수년에 걸쳐 거액을 들여 건물을 증축하고 리모델링하고 고가의 장비를 설치하며 멋진 병원으로 재단장했다. 이로써 경쟁력을 높였다고 한다.

과연 두 공공병원의 변신은 다른 공공의료기관이 따라가야 할 롤모델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쉽게도 회의적이다. 리더가 될 만한 탁월한 자질이나 차별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범생들이 추진해온 병원은 실망스럽게도 모범스럽지 않았다. 여타의 민간병원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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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가 사명과 경영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균형추를 경영 쪽으로 옮겨놓은 것은 이미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공공과 민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원이 사이즈 경제의 논리를 좇아 해마다 휘황찬란한 몸집 불리기를 해왔다. 그러면서 의료는 점점 더 고비용·저효율 사치재 산업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 수많은 병원 속에 또 비슷한 하나, ‘원 오브(one of) 병원’을 더하는 것이 아직 그렇지 못한 병원들의 미래 과업이 되어야 하는가? 끝없는 욕망의 화수분 같은 그런 군비 경쟁이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 해답인가?

위기의 공공병원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해당 부처나 지자체로부터 재정 건전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만 바꾼 경영 압박을 받아온 지 이미 오래다. ‘공공의료는 즉 빈민의료인가?’ ‘우리도 빚을 내서라도 일단 몸집을 불려야 하나?’ ‘이른바 돈 되는 진료과목은 키우고 돈 안 되는 진료과목은 폐지해야 하는가?’ 민간병원을 어쭙잖게 흉내 내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해왔다.

요즈음 진주의료원 사태가 지역적 이슈에서 벗어나 다소 이념 대결의 양상까지 띤 전국적 이슈가 되었다. 공공의료 혹은 공공의료기관에 대한 논쟁이 이처럼 진지하게 수면 위로 사회 전면에 부상한 적은 없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공공병원의 역할에 대해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민간병원이 경제 논리에 묶여 있는 한,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결코 차마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

현재의 혼란하고 혼탁한 의료 현실은 오히려 공공병원에 좋은 기회다. 공공병원은 이제껏 묵묵히 해오던 역할들을 더욱 표 나게 알리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바로 그 ‘믿을 수 있는 병원’이 돼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공병원에 가면 최소한 바가지나 속임수는 당하지 않는다든지, 무조건 고가의 검사나 수술부터 권하지 않는다든지, 횡행하는 임상시험의 대상자가 되지 않는다든지, 과잉의료가 아닌 적정의료를 받을 수 있다든지, 의료인과 넉넉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든지, 돈이 없어도 꼭 필요한 진료라면 어떻게든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준다든지, 타 병원에서 “다른 병원 가보세요”라는 한마디로 내몰린 복지 사각지대의 환자들에게 따뜻하게 붕대를 감아준다든지 등등. 여기에 공공병원의 빛나는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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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전제조건이 있다. 이런 건강한 방향의 의료가 정책 전환으로 이어지고 뒷받침되기까지, 그 과도기 동안 정부나 지자체의 일관되고 소신 있는 신뢰와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공공의료기관은 병든 의료계에 새로운 숨결을 틔우는 중추적 역할을 리드해나갈 수 있다. 이 역할이야말로 민간병원이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서울동부시립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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