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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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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항공기 ‘진상 승객’ 파문

등록 2013-04-30 17:54 수정 2020-05-03 04:27

폭행 아니면 다 된다는 190만원의 오만

인간을 수단으로만 보는 ‘고객님들’ 저급한 사고가 문제
무리한 요구도 응하게 만드는 기업 고과 정책도 바뀌어야
959호 크로스 트윗

959호 크로스 트윗

는 연금술사 형제가 펼 치는 모험을 다룬 만화다. 이들은 폐광석을 같은 질량의 금으로 바꾸고, 고장난 라디오 를 같은 질량의 새 라디오로 바꾸는 마법 같 은 연금술을 선보인다. 그들은 연금술의 주 요 법칙으로 ‘등가교환의 법칙’을 드는데, 무 언가를 얻으려면 그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폐경제의 논리도 이와 같다. 예컨대 인 천에서 로스앤젤레스(LA)까지 가려면 항공 사에 그에 상응하는 화폐를 지불해야 한다. 대한항공 홈페이지에서 보면 4월29일 출발 하는 인천~LA 편도 티켓 가격은 일반석이 142만7천원이었고 프레스티지석(비즈니스 석)은 332만8900원이었다(세금·유류할증 료 포함). 비즈니스석에 탑승하려면 이코노 미석에 탑승할 때보다 약 190만원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대신 널찍한 좌석 간 간격과 좌 석 너비, 180도에 가깝게 젖힐 수 있는 의자, 도자기에 담겨 나오는 코스요리가 제공된 다. 비즈니스석 전용 탑승수속 카운터가 있 어 좀더 쾌적하고 빠른 탑승이 가능하고, 착 륙 뒤에도 이코노미석 이용자들보다 먼저 내 릴 수 있다.

희대의 진상 고객으로 유명해진 대기업 임 원 왕아무개씨는 190만원에 ‘누구보다 더하 게’ 진상 부려도 되는 권리가 포함된 줄 알았 나보다. 4월15일 인천~LA 대한항공 여객기 에 탑승한 그는 안전벨트를 채워달라는 승 무원의 요구에 불응했고, 밥이 삭았다느니 라면이 덜 익었다느니 라면이 짜다느니 불평 하며 6차례나 라면을 다시 끓이게 하더니, 급기야 ‘진격의 임원’이 돼 주방에 쳐들어가 승무원의 얼굴을 잡지로 가격했다.

어디 그 임원뿐이랴. 항공사에 내는 돈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불하는 것’ 이라는 개념보다 ‘승무원에게 진상짓 할 권 리’의 대가라는 관념을 가진 이가 많다. 기업 은 이를 부추긴다. 고객이 기업에 항의하면 대개 승무원의 인사고과에 불리하게 적용하 기에 승무원들은 승객이 무리한 것을 요구 하더라도 웬만하면 응하고 넘어간다. 항공 사 승무원뿐만 아니다. 많은 서비스 노동자 가 본질을 벗어난 서비스까지 제공해야 한 다. 굴욕적인 상황에서 미소짓기, 잘못한 게 없더라도 고개 숙여 사과하기.

에서 형제는 연금술을 통해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려 했다. 죽은 이 를 되살리는 것은 금기에 해당했고, 금기를 깬 대가로 형은 팔과 다리, 동생은 온 몸뚱 이를 잃는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하고많 은 진상짓 중 폭행만 금기인 것 같다. 진상남 왕씨는 금기를 깨 직장을 잃었지만, 그가 폭 행‘까지는’ 안 했다면 이 사건은 묻혔을 가능 성이 크다. 사건이 보도된 뒤 온라인 취업 카 페 게시판은 일상화된 언어폭력·성희롱 등 을 성토하는 글로 빼곡했다. 너무나 일상화 돼 경각심 없이 자행되는 진상짓들. 인간을 수단으로만 보는 ‘고객님’들과 기업들. 한국 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인 것에는 이런 사회 풍토도 하나 의 원인이지 않을까. 이번 기회를 통해 폭행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진상짓이 금기가 되길 바란다.

최서윤 발행·편집인

감정도 규율되는 노동현실 우리도 ‘왕 상무’다편재하는 감정노동 시스템에선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
왕 상무는 고객의 보편 상황 은폐하는 시뮬라크라일 뿐
959호 크로스 트윗

959호 크로스 트윗

인기 하락을 겪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라는 작품이다. 스타가 가 상 부부가 되어 진짜 부부 행세를 하는 내용 이다. 초기의 인기에 비하면 고전이라는 말 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초기에 아이돌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일은 리얼리티를 위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억지 감정을 진짜 감정인 것처럼 처리해내는 선수인 아이돌 스타들 말고는 그것을 잘 감 당해낼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연스러움, 천연덕스 러움에 대한 반응 열기는 엷어졌다. 식상해 지기 시작했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몇 년 사 이, 그 짧은 기간에도 우리 주변에 그런 일들 이 비일비재해졌다고 지적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대부분의 서비스 노동 현장에서는 고 객의 감정을 무조건 챙겨야 한다는 노동 지 침 목록은 늘고, 노동자의 감정은 버려야 하 는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일상에서 그런 일이 늘어나 넘치는 마당에 텔레비전에서 벌어지는 가짜 감정놀이가 재 밌을 턱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파내고 진짜처럼 억지 감 정을 넣어 서비스를 하고, 그를 통해 임금 을 얻는 과정을 감정노동이라 부른다. 감정 노동은 표현 지침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반복해 숙련화한 결과다. 자신의 감정 대신 지침에 입각한 표현 규칙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노동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본인의 감정을 유보해 야 한다. 언제나 고객을 보고 웃어라, 카메 라를 들이대도 언제든 짜증 내지 말고 받 아들여라, 큰소리로 씩씩하게 관계자들에 게 절하라 등의 지침은 아이돌을 넘어 서비 스 종사자 모두에게 필연적인 지침으로 다 가온다.

포스코의 왕 상무와 대한항공 사건은 가 인기 하락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도처에 표현 규칙, 지침에 따라 노동을 해야 하는 감정노 동자가 깔려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많은 경 우 초점은 왕 상무에 맞춰졌지만 사실 왕 상 무는 대부분의 고객이 그렇다는 사실을 숨 겨주는 시뮬라크라 같은 존재일 뿐이다. 돈 을 쓰는 고객이 왕 상무와 같은 지위에 올려 지는 일이 다반사인 형국에 그런 고객이 되 길 누가 주저하랴.

편의점 고객의 잔돈에까지 높임말을 붙이 도록 한 표현 규칙,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무 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표현 규칙이 있고, 그에 따라 훈련받길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판에 고객이 왕 상무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 다. 서비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욕망으로 노동자의 몸 안에 표현 규칙을 기억하게 만 들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웃음을 띠거나 가까이 다가가도록 강요하는 사용자가 있는 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왕 상무가 될 조건에 놓여 있는 셈이다. 왕 대접을 받는 고객이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고객 자 신도 그런 노동을 할진대 그 대접이 마냥 즐 겁지만은 않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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