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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어르신 동지들 탈핵 전도사 되다

어르신들과 이계삼 선생의 기약 없는 송전탑 싸움… 원전이 그렇게 필요하면 서울에 지어서 시골 어르신들에게 고통을 주지는 말자
등록 2013-01-25 21:19 수정 2020-05-03 04:27

지난해 1월 중순 몇몇 언론에 단신 기사가 올라왔다. ‘밀양, 송전탑 반대 70대 농민 분신’. 기사 내용을 확인해보니, 765kV의 전기가 흐를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74살의 한 농민이 스스로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으며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이전에 송전탑에 반대한다는 경남 밀양의 주민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벌써 6년 넘게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던 주민들은 “우리는 합리적인 대안을 내고 있는데, 한국전력공사(한전)는 들은 척도 않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경남 밀양의 어르신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송전탑 공사를 막고 있다. 밀양송전탑대책위원회 주민들이 1월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앞에서 상경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경남 밀양의 어르신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송전탑 공사를 막고 있다. 밀양송전탑대책위원회 주민들이 1월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앞에서 상경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발언하는 사람도 울고 듣는 사람도 울고

기사를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던 것은 그때의 그 호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호소를 들은 뒤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이 엄습했다.

그 며칠 뒤 밀양에 사는 이계삼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여러 언론에 영혼을 울리는 글을 써왔고, 내가 아는 교사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교사였다. 그러던 그가 ‘꿈의 직업’이라는 교사를 그만두고 귀농을 위한 교육기관을 준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참이다. 그가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를 발족하려는데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에게는 그 전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보름 뒤 밀양 시내에서 열린 집회 장소로 갔다. 그날 나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을 보았다. 집회 무대로 꾸민 트럭 위에서 신부님은 사회를 보며 구호를 외쳤고, 이계삼 선생은 집회 실무를 보느라고 정신없었다. 집회의 주된 참석자는 평생을 농투성이로 살아온 농민들이었다.

분신을 한 농민의 동생분이 단상에 올라와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논 한가운데 송전탑을 세우면서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준다고 했다. 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온 우리 형제는 한순간에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되었다. 보다 못해 공사를 막으려 했는데, 젊은 용역들은 나이 든 노인들을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조롱했다. 참다 못한 형님이 자신이 죽어야 문제가 해결되겠다며 분신을 했다. 너무 억울하다. 만약 한전이 공사를 강행하면 90살 노모를 모시고 나도 형님을 따라가겠다.” 그날 단상에는 할머니, 여스님 등도 올라왔다. 모두들 그동안 당한 모욕과 폭력에 대해 토로했다. 추운 겨울 산을 오르내리며 공사를 막으려던 시골 어르신들은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고, 겪지 말아야 할 경험을 했다. 집회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발언하는 사람도 울고, 듣는 사람도 울었다.

집회가 끝난 뒤 이계삼 선생과 잠깐 차를 한잔할 시간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라는 질문에 이계삼 선생은 “분신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귀농 교육기관을 만들려는 계획은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것도 같이 추진해야죠”라고 특유의 순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기약 없는 싸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원전에 찬성하는 시장 상인을 만나자…

그 뒤 나도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에 조금이나마 연대하게 되었다. 탈핵 희망버스가 조직돼 밀양으로 가자 밀양의 사정이 언론과 사람들의 입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밀양에 간 사람들은 송전탑을 건설하겠다며 벌목한 자리에 나무를 심었다.

한전은 석 달 정도만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공사를 했다. 어르신들은 산 위에 농성장을 만들고 송전탑 건설을 몸으로 막았다. 한전이 헬기로 공사 자재를 실어나르며 공사를 강행하려 하자 헬기를 몸으로 막았다. 한전은 주민들을 상대로 가처분 소송을 내고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냈다.

실정법을 위반해서 공사를 방해한다는 한전의 주장에, 주민들은 “국가가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위협하는 것이 정당하냐?”고 반문했다. “전기 많이 쓰는 대기업과 대도시 때문에 원전을 짓고, 그 전기를 끌고 가려고 시골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마을을 파괴하고 산을 파헤치는 게 정당하냐?”고 반문했다.

힘든 싸움이 계속됐다. 그런 중간중간에 이계삼 선생을 만나면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힘들 만도 한데 그는 어르신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실제로 어르신들은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본 밀양 어르신들은 ‘탈핵 전도사’가 돼갔다. 송전탑 문제의 근원이 원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산과 울산의 경계 지역에 추진 중인 신고리 원전만 짓지 않으면 밀양의 송전탑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단 몇 분 만에 원전이 왜 나쁜지, 송전탑 문제가 무엇인지를 누구에게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번은 밀양 어르신들과 함께 신규 원전이 추진 중인 경북 영덕을 간 적이 있었다. 시장 상인들 중에 원전에 찬성하는 분이 있자, 어느새 밀양 어르신들은 그분을 붙잡고 원전이 왜 나쁜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어르신들을 보며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원전이 그렇게 필요하면 서울에 지어서 최소한 시골 어르신들에게 고통을 주지는 말자. 송전탑이 그렇게 좋으면 한전 사장 사택을 송전탑 바로 밑에 짓자. 권력을 가진 사람들 땅 위로 송전탑을 지나가게 하자. 그게 싫다면 시골 어르신들을 ‘님비’니 뭐니 매도하지 말자.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밀양 어르신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1년 동안 송전탑 공사를 막았다. 밀양에 들어설 예정이던 69개의 거대한 송전탑은 70∼80대 노인들에 의해 막혀 있었다. 대선이 다가오며 어르신들의 기대는 커졌다. 대선을 통해 송전탑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계삼 선생은 송전탑 문제가 해결되면 귀농학교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농사와 교육을 함께하는 것은 그가 꿈꾸는 ‘소박하고도 좋은 삶’이었다. 나도 하루속히 그가 그 꿈을 실현해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땅 위에서 농성하니 편한 거다”

대선 당일, 결과를 보며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들이 이계삼 선생과 밀양 어르신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계삼 선생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걱정이 됐지만 전화 통화가 된들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전자우편이 왔다. 밀양 어르신들은 대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송전탑 반대운동을 계속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전자우편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그런 논의를 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을까?

이후 밀양 어르신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땅 위에서 농성하니 편한 거다. 송전탑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겠노”라며 울산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울산의 노동자들은 이 어르신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는지 ‘어르신 동지’라고 했다고 한다. 어르신 동지들은 부산 한진중공업,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충남 아산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찾아갔다. 찾아가서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격려했다.

어느새 밀양은 한국의 탈핵운동에서 상징이 되었다.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의 죽음이 노동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각성을 가져왔던 것처럼, 한 농민의 죽음과 밀양의 ‘어르신 동지’들은 원전과 송전탑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밀양 어르신들과 이계삼 선생은 기약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최소한 이분들을 외롭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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