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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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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덕님께 청테이프를~

등록 2012-09-04 19:19 수정 2020-05-03 04:26

길고도 험한 일주일이었어요. ‘볼라벤’부터 ‘덴빈’까지. 일주일에 2번씩이나 쉬지 않고 험한 태풍이 찾아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창문 깨질까봐 큼지막하게 붙여뒀던 테이프를 떼내는 일도 만만찮아요. 그 사이 창문에 희뿌옇게 눌어붙은 접착제 자국, 이거 떼내다 보면 또 한 주가 가게 생겼어요. 한가하게 창문 닦을 걱정만 하고 있다 보니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요. 아이 없는 맞벌이 가장의 어설픈 푸념이 한가하게 들린대요.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에게는 몇 배로 거친 일주일이었다네요. 태풍 탓에 전국에 내려진 휴교령으로 어린아이를 둔 직장맘들은 상사 눈치를 보며 연차를 쓰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태풍에 집이며 밭이며 양식장을 잃은 분들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천재지변을 앞에 두고도 육아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이 시대 부모들의 현실을 보면,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 걱정부터 앞서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육아 세계에서는 태풍이 지나간 맑은 하늘을 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요. 지난 8월31일 전남 나주에서 붙잡힌 초등학생 납치·성폭행 용의자를 보면 그래요. 한밤중에 주택 거실에 들어와 가족들과 잠자던 7살 어린이를 이불째 납치해 범행을 저질렀거든요. 서울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터진 흉악 범죄가 할 말을 잃게 만들어요. 용의자가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이라는 이야기가 더 섬뜩하네요.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성폭력은 병적인 거니까 엄격하게 다루라”고 주문했어요.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아이’ 마음 놓고 기르려면 아무래도 창문뿐만 아니라 대문에도 테이프를 붙여야 할 판이에요. 문틈도 훔쳐볼 수 없도록 꼼꼼하게 발라야겠어요.

사진 한겨레 강창광

사진 한겨레 강창광

창문과 대문에만 테이프를 붙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최근에는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어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경선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했던 홍사덕 전 의원의 ‘망언’ 때문이에요. 홍 의원은 8월29일 기자들을 만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이라며 “야당 등에서 유신을 얘기할 때 안 좋은 부분만 얘기하고 좋은 부분은 빼는데 이는 참 비열한 짓”이라고 말했거든요. 게다가 홍 전 의원은 “(5·16에 대한 입장을 바꾸라는 것은) 자기 아버지를 욕하면 대통령 시켜주겠다는 건데 내가 후보라면 절대 무릎 꿇지 않는다”고도 말한 적이 있어요. 이건 뭐,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아이’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해괴한 발언 때문에 역사 공부에 혼란을 느낄까 걱정돼요. 그렇다고 우리 아이 귀를 테이프로 막을 수는 없어요. 그 대신 홍 전 의원께 테이프를 조용히 쥐어드리려 해요. 테이프 사용법, 어렵지 않아요. 소방방재청의 태풍 대비 안내를 참고하세요. ×자 형태로 잘라서… 네, 거기에 붙여주세요. 저는 이제부터라도 테이프 사놓을 돈을 열심히 모아둘까 해요. 어찌됐든, 이게 다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아이’를 위한 일이니까요.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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