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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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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플레이

등록 2012-08-08 15:40 수정 2020-05-03 04:26

지독하게 덥다. 런던올림픽이 그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다. 새벽 3~4시까지 텔레비전으로 올림픽 경기 중계를 본다. 폭염과 수면 부족으로 몸이 흐느적거린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스포츠의 매력은 뭘까? 선수들의 단련된 몸과 정신이 빚어내는 승부의 아름다운 긴장. 감동과 전율의 발원지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의 무게는 똑같다. 승자의 것과 패자의 것이 다르지 않다. 국적과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같이 진하다. 경쟁의 공정성과 페어플레이가 스포츠의 헌법이어야 하는 이유다. 강자를 피하려 ‘져주기 게임’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등 4개 팀을 실격 처리한 세계배드민턴연맹의 결정을 존중하며, 여자펜싱 에페 준결승에서 ‘멈춰선 1초’로 신아람의 메달을 ‘강탈’한 오심을 비판하는 까닭이다.
‘차별 없음’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인치의 변덕스러운 자비로움이 아닌, 법치의 차가운 차별 없음이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다. 법치는 약육강식을 제어하려는 인간정신의 발명품이다. 법치는 그 심장과 뇌수에 ‘사회적 약자 보호’를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법치가 근대를 전근대와 구별짓는 중요 기준인 까닭이다.
MB가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이라며 친인척·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한 엿새 뒤인 7월30일, ‘BBK 대책팀장’이던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이 가석방됐다. 모범수란다. MB는 사과문을 쓴 바로 그 손으로 최측근의 가석방을 승인했다. ‘권력형 탈옥’이라는 민주통합당의 비판은 적확하다. 은진수가 풀려나고 닷새 뒤인 8월4일, 한상균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감옥문을 나섰다. 3년 형기를 꽉 채운 만기 출소다. MB 치하의 노동자에게 모범수나 가석방은 안드로메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은진수와 한상균만이 아니다.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남일당 옥상에서 살아남은 시민 8명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5818명의 시민이 특별사면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지만 MB는 오불관언이다. 반면 MB의 대학 동창이자 후원자인 천신일 세종나모여행 회장은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고혈압 따위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처분을 받은 지난해 9월 이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20층 VIP 병실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왕의 남자’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구속 수감 3주 만에 담당 판사와 검사도 모르게 서울삼성병원 20층 VIP 병실에 입원해 심장수술을 받았다. 전무후무한 사태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칭병’(稱病)은 이 땅의 권력자와 돈 많은 자들이 법의 징벌을 무력화하는 요술방망이다. 휠체어와 응급환자용 침대를 활용한 쇼는 ‘권력형 탈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서울구치소에 있는 이상득 전 의원의 휠체어 쇼도 택일만 남았을지 모른다.
일터와 삶터를 지키려고 정리해고와 강제철거에 맞선 이들에겐 ‘떼법’이라며 불관용을 주장하고, 권력과 연줄을 내세워 ‘삥’ 뜯은 파렴치범들에겐 ‘자비’를 베푼다. 이게 2012년 대한민국 ‘법치’의 민낯이다. 이 땅에서 법은 이미 가진 자의 흉기다. 군대도 경찰도 아닌 ‘컨택터스’ 따위 자본의 사병이 노동자와 시민을 두들겨패도 아무 일 없다. 민주주의는 ‘법’이라는 흉기에 찔려 숨을 헐떡이고, 공화국은 자본의 사병한테 생매장당하게 생겼다. 지금, 여기는 누구의 나라인가.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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