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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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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 일본 세력의 서울 침투 제1 루트

한말, 도성 안 상주 공관 설치로 침략 전초기지 두려 한 일본의 속셈

임오군란 때 불타 재건된 임시 공사관 ‘청수관’ 앞길이 지금의 충정로
등록 2012-06-22 11:41 수정 2020-05-03 04:26
1910년대 다케조에마치 부근에서 바라본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다케조에마치는 본래 현재의 신문로 경향신문사 앞에서 서대문로타리를 지나 아현삼거리에 이르는 1.5km에 달하는 길이었으나 1984년 800m로 단축됐다. 이곳은 개항 이후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일본의 각종 ‘정치 공작’이 구상되고 집행된 거점이었다. 전우용 제공

1910년대 다케조에마치 부근에서 바라본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다케조에마치는 본래 현재의 신문로 경향신문사 앞에서 서대문로타리를 지나 아현삼거리에 이르는 1.5km에 달하는 길이었으나 1984년 800m로 단축됐다. 이곳은 개항 이후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일본의 각종 ‘정치 공작’이 구상되고 집행된 거점이었다. 전우용 제공

조선 정부 대표 신헌과 일본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 기요타카가 강화도에서 조약 내용을 둘러싸고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1876년 초, 자기가 만든 ‘척화’(斥和)의 국시(國是)가 공공연히 무시당하는 걸 보는 대원군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때 마침 이순신의 8대손 이문영이 인사차 들렀다. 그를 본 대원군은 다짜고짜 “그대는 충무공의 봉사손(奉祀孫)인데 왜적을 막을 계책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왜적의 군함 한 척에 겁먹고 협상장에 신하를 내보낸 자기 아들에 대한 불만을 애꿎은 방문객에게 떠넘긴 것이다. 너희 같은 신하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이 꼴이 됐다는 책망의 뜻도 담겨 있었을 테고. 대원군의 심기를 모를 턱 없는 이문영은 슬쩍 눙쳤다. “대감께서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충무공의 8대손이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의 8대손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당시 조선에는 구로다가 임진왜란 때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8대손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원군은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다.

일 공사관, 서대문 밖 군영 안에 터 잡아

그러나 가토의 8대손은 이순신의 8대손보다 훨씬 영민했다. 이미 서양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는 일본은 어떤 조항을 넣어야 자기들에게 유리한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평등조약’의 결정판을 만들려 했고, 조선 정부는 옛 관행을 구체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는 그들의 주장에 적절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해 2월, 병자수호조규가 체결됐는데, 그 제2관은 “일본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언제든지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판서와 직접 교제사무를 상의하게 할 수 있다. 사신은 사정에 따라 계속 체류할 수도 있고 즉시 귀국할 수도 있다”였다. 조선 정부는 옛날 일본 사신들이 동평관(東平館)에 드나들던 일을 생각했지만, 일본은 도성 안에 상주(常駐) 공관을 둘 심산이었다. 뒤늦게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린 조선 정부는 부득이 상주 공관을 허용하더라도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임진왜란 이래, 아니 그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백성이 증오하는 자들을 성 안에 두고서 사달이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1879년 4월, 성 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 밖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 서대문 밖 경기감영 바로 옆, 당시 경기중영(京畿中營)이라는 군영 안에 있던 청수관(淸水館)에 일단의 일본인들이 짐을 풀었다. 주조선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와 수행원 15명,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이었다. 이 자리에는 지금 동명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조선 정부는 이 집을 일본 상주 공사관으로 내줄 생각이 없었지만, 석 달 뒤 하나부사가 귀국한 뒤에도 수행원들은 집을 비워주지 않고 버텼다. 조선 정부가 속으로만 끙끙 앓는 사이, 그 집은 어영부영 일본공사관이 돼버렸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한 무리의 젊은 관리들이 일본 시찰길에 오르려고 도성 문을 나서던 1881년 4월, 일본군 공병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가 도성 안에 들어왔다. 조선 정부가 새로 창설하기로 한 별기군 교관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정부가 신식 군대 창설을 논의하던 당초에 하나부사가 그의 이름을 적시해 추천한 것으로 보아, 일본 내 유력자들에게 촉망받는 젊은 장교였던 듯하다. 호리모토는 별기군 80여 명에게 자기가 배운 ‘독일식’ 제식훈련을 했다. 처음의 훈련 장소는 일본 공사관 바로 옆, 모화관 주변 벌판이었는데 조금 뒤에 조선 군대의 공식 훈련장이던 하도감(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으로 옮겼다. 호리모토는 조선 병사들을 두어 달 훈련한 뒤, 성과가 대단하다고 자평하며 아예 병학교(兵學校)를 설립하자고 건의했다. 스스로 교장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고종과 대신들에게 별기군 훈련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려 했다.

갑신정변 때 화재 뒤 애초 장소로 이전

조선의 대관과 장수들이 훈련을 구경하러 모여 있던 어느 날, 호리모토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또 다른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귀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뽑아 고양이 한 마리를 다섯 토막으로 만들어버렸다. 피가 낭자하고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진 모습에 조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는 고기를 훔쳐 먹은 놈을 징벌했다며 태연히 웃었다. 그가 과시하려 한 것은 규율에 엄격한 일본식 ‘무사도’이거나 자신의 ‘검술’이었겠으나, 조선 관리들의 눈에는 그의 ‘잔인성’만 보였다. 누군가 “왜인이 이토록 잔인하니 반드시 큰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뒤, 별기군에 비한 차별 대우와 녹봉 장기 연체에 격분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별기군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하도감으로 몰려가 호리모토를 죽이고, 다시 서대문 밖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가 불을 지르고 경비 순사 등을 살해했다. 하나부사 일행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며 양화진을 거쳐 인천으로 달아났다. 청병(淸兵)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한 뒤,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피해 배상을 받아내는 한편 도성 안에 새 공사관을 얻었다. 남산 기슭 예장동 이종승의 집을 임시 공사관으로 삼은 하나부사는 교동 박영효의 집을 매수해 정식 공사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의 관훈동 경인미술관 자리였다. 새 공사관 낙성식은 1884년 11월3일에 거행됐는데 그로부터 딱 한 달 하루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으로 수립된 새 정권의 ‘삼일천하’가 막을 내릴 때, 교동의 새 일본 공사관도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인 군중이 방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불을 지른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몇 달 뒤 다시 돌아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임오군란 때 불탔다가 재건된 청수관을 다시 임시 공사관으로 썼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 경성부는 그 일을 ‘기념’해 청수관 앞길과 주변 동네에 ‘다케조에마치’(竹添町)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하나부사마치가 아니라 다케조에마치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최초 순국 민영환 시호 따 충정로로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을 개정하기 위한 서울시 지명개정위원회가 열렸다. 당연히 다케조에마치도 개정 대상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최초로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따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 길은 ‘충정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에는 ‘죽첨정’(竹添町)의 ‘죽’이 충정공이 죽은 자리에 ‘대나무’가 자랐다는 ‘전설’과 부합한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길이 왜 충정로인지 아는 사람도, 그 길이 일본 세력의 서울 침투 제일 루트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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