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은 동아시아 3국에서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기념일이다. 한국에서는 광복절, 일본에서는 종전일, 중국에서는 한때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었다(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일본 대표가 항복 문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9월3일을 항일전쟁승리기념일로 삼고 있다). 1945년 8월15일, 재한 화교들도 일본 제국의 적국민(敵國民) 처지에서 벗어났다. 이제 그들의 모국은 한국인에게 ‘해방’을 안겨준 전승국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시선이 달라지진 않았다. 말로는 ‘미·영·중·소’ 4대 전승국이라고 했지만, 한국인들은 중국과 중국인에게는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다.
한국군에 자원입대해 전사한 화교들
다만 한국의 경제관계가 달라졌고, 재한 화교의 위치는 그 새로운 관계를 활용하는 데 아주 유리했다. 거의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했던 한국 경제는 일본 자본과 기술, 인력이 물러나자 괴멸 상태에 빠졌다. 수출입이 아니라 이출입(移出入)이라 불렸던 대일 무역도 사실상 중단됐다. 대신 중국·홍콩·마카오가 새로운 교역 대상지로 급부상했다. 중국 상인들이 그 무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해방 직후 한동안, 중국 상인들은 한국 무역액의 반 이상을 취급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한 뒤 사정은 다시 달라졌다.
재한 화교 98% 이상의 고향인 산둥성이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에 들어갔다. ‘고향’을 택한 이들도 있었고, ‘생활’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후퇴할 때,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연고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중국인들도 있었다. 당시의 ‘이념’은 생활에 부속된 실체일 수밖에 없었다. 재한 화교들도 한국인들과 함께 ‘이산의 아픔’과 ‘이념 전쟁’을 겪었다. 특히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재한 화교들은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적극적으로 내보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전쟁 중, 그리고 휴전 뒤 10년이 훨씬 넘도록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로 시작하는 군가 는 대중적인 ‘국민가요’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빼놓지 않고 부르는 노래였다. 재한 화교들은 자신이 ‘오랑캐의 일원이되 보통 오랑캐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절대 지지하는 ‘반공 자유 진영의 일원’이라는 표지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전쟁 중 일부 화교 청년이 한국군에 자원입대했고 그들 중 전사상자(戰死傷者)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들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특별히’ 인색했다. 그들은 한국 군대에서 죽거나 다쳤으나,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 원호 대상에서 배제됐다. 그들은 한국의 ‘호국영령’이 될 수 없었다. 한국 군대에서 죽은 사람들조차 푸대접을 받았으니 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인에 대한 차별 관념은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에 이미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더구나 이승만과 박정희의 중국인 혐오는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에게 1년에 1번씩 ‘지문’을 찍게 한다고 일본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막상 재한 화교에게는 1년에 2번씩 ‘지문’을 찍게 했다. 중국인들에게는 토지·가옥의 취득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타 재산권 행사에도 여러 제약을 가했다. 한국전쟁의 폭격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소공동과 명동 일대의 중국인 소유 가옥들은 그런 규제 때문에 ‘화석(化石) 건물’이 돼갔다.
재미동포, 시청 앞 ‘정비’ 민원
1966년 10월 말,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방한했다. 베트남전쟁 참전 7개국 순방의 일환이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그는 도처에서 베트남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대중에게서 ‘양키 고 홈’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환대였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에 이르는 연도 전체가 열광적으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마음에도 흥분과 감격이 차올랐다. 그는 환영객들에게 답례하느라 서둘러 공식 환영식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시청 앞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다 무료해진 외신 카메라 기자들이 카메라 방향을 시청 맞은편 중국인의 ‘화석 건물’들 쪽으로 돌렸다. 낡고 초라하며 무질서하게 늘어선 건물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미국의 TV 화면으로 송출됐다.
서울시청 맞은편 화교회관이 들어설 뻔했던 자리에 두 폭 병풍 모양으로 우뚝 솟은 플라자호텔과 그 뒤의 한화빌딩이 보인다. 플라자호텔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서울시청에서 소공동 화교 집단 거주지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계획적 기획은 대체로 성공해 이제 이 호텔 뒤편에서 재한 화교가 겪은 비운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포성이 멎은 지 10년 만에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한 고국이 자랑스러워 힘이 들어갔던 재미동포들의 어깨에서 다시 힘이 빠졌다. 재미동포들은 나라의 얼굴인 시청 앞 광장 주변을 ‘정비’해달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청와대에 하소연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 주도하에 소공동 일대 재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서울시는 화교들이 땅을 내놓으면 그 땅을 합친 뒤 그 위에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집을 고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던 화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도 보조금을 보내왔다. 1971년 가을, 시청 맞은편에 있던 화석 건물들이 헐렸다. 그러나 이듬해까지 완공하겠다던 화교회관은 몇 년이 흐르도록 착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건물에서 영업하며 화교회관에 입주할 날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화교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한국화약이 그들의 땅을 사들이겠다고 제의했다. 화교들은 몇 대에 걸쳐 일궈온 생활의 터전, 고향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온 삶의 근거를 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시청 맞은편에 두 폭 병풍 모양의 플라자호텔이 착공돼 이듬해 문을 열었다. 더불어 9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소공동 일대에 쌓인 중국인들의 자취도 병풍 뒤편, 서울 시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중국인들 향한 차별, 이주노동자에게로
이때를 전후해 재한 화교의 상당수가 대만이나 제3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이 고향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제3국뿐 아니라 대만도 ‘타국’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그들이 자기 이웃에 뿌리내리고 살게 놓아두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백인에게는 관대했으나 중국인에게는 각박했다. 재한 외국인 중 화교의 비중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줄어든 지금, 한국인들의 ‘각박함’은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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