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4월1일 조선총독부는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하는 부역 확장을 단행했다. 이로써 경성부의 면적은 종전보다 4배 가까이, 인구는 2배 가까이 늘었다. 현재의 서울 강북 지역 대부분과 강남 지역 일부를 포함하는 인구 70만여 명의 현대적 대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중일전쟁 도발을 앞두고 광역 단위의 전시 통제 경제체제를 수립하려는 행정 조처였다. 새 편입 지역과 옛 도심부를 잇는 도로 공사와 택지 개발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변하는 곳과 그대로인 곳,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을 구분하는 사람들의 감수성도 예민해졌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이 직후 는 ‘팽창 경성 가두 변천기’라는 연재 기사를 실어 국제적 대도시로 변해가는 경성 이곳저곳의 면모를 묘사했다. 인용문이 좀 길어 무성의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중 서소문정(현재의 서소문동)에 관한 기사를 발췌해 소개한다.
“서소문정 골목은 서울에 있어서 중국 사람이 많이 집중하여 사는 곳이다. 이 골목을 지나갈 때에는 청요리에 많이 쓰는 도야지 기름 냄새가 물컹물컹 난다. 중국 사람들은 모두 중국 옷을 그냥 그대로 입고 중국 신을 꼭 신고 지낸다. 그래서 이 골목을 지나갈 때에는 흡사히 중국 산동성 어느 곳에나 온 느낌을 가지게 한다. 큰길의 좌편 우편으로 벌려 있는 것은 중국인의 잡화상점과 요리점 등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눈에 많이 뜨이는 것은 호떡집이 많은 것이다. 큰길가는 상점의 거리로 보이지만 그 뒷골목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때에는 무엇보다도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중국 갈보와 아편쟁이들이다. 중국 갈보들은 값싼 백분을 낯에 새벽 칠하듯이 하얗게 바르고 입술에는 피를 바른 것처럼 빨간 연지 칠을 하고서 이성에 주린 중국 남자 가슴을 호린다. 그리고 이 뒷골목처럼 아편쟁이가 많이 출입하는 곳은 드물 것이다. 벌통같이 기괴한 구조로 된 중국 사람들의 컴컴한 방 안에서 번거로운 세상일은 내 몰라 하고서 입에 아편을 빨며 혹은 팔에 아편주사침을 찌르고 있는 남녀가 눕고 앉아 있는 광경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면에는 도박으로 그날그날을 지내가는 부류도 있다. 도박 끝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필경에는 끔찍스러운 살인사건도 가끔 자아내게 된다. 미국의 카포네 일당이 이곳으로 한번 시찰을 온다 하더래도 오히려 배워갈 만한 거리가 많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재판소(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의 문 앞에서 모든 죄악의 무리는 밀매음으로 도박으로 아편으로 각색의 어두운 장면을 전개하고 있으니 익살스럽다면 이보다 더 익살스러운 사실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서소문정 뒷골목의 어두운 장면은 어느 때나 명랑하게 될 것인고?”
중일전쟁 전야 서소문동 뒷골목의 중국인 거리는 마약과 성매매의 거리였다. 팽창하는 경성이 외곽 지역 곳곳에 ‘광명의 신천지’를 만들어내고 있었음에도, 이곳은 더러운 슬럼이자 어둠침침한 게토였다. 중국인은 식민지 백성에게조차 손가락질받는 또 다른 식민지 백성이었고, 중국인 거리는 식민 도시 안의 또 다른 식민 도시였다. 서울의 중국인들은 직설적인 중국의 표상이었다. 그들은 동아병부(東亞病夫·동아시아의 병든 남자)였고, 문명국의 ‘지도’를 거부하는 민족이 얼마나 비참한 타락 상태에 빠지는지를 온몸으로 증거하는 ‘반면교사’였다.
멸시 받아도 ‘띵호아’라고 대답해야 하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재조선 중국인은 ‘적국민’이 되었다. 조선을 찾는 쿨리의 발길이 끊겼고, 서소문동에 몰려 살던 중국인들 중에도 되돌아간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지저분한 중국인은 줄었으나 대신 감시받는 중국인이 늘었다. 일본 경찰에게서 ‘안전성’을 인정받은 중국인들만이, 중국 내 일본군 점령 지역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전쟁 물자 전반의 수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중국인 무역업자들이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은 제한돼 있었다. 비단이 대표 품목이었지만 그조차 한때였다. 1940년대 이후 전 국민의 군사화가 강행되는 상황에서 비단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건 스스로 ‘비(非)국민’임을 인증하는 행위였다.
1938년 봄,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가수 김정구가 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명월이 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이 좋구나/ 우리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도 띵호와”
그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이를 까맣게 칠하고 입으로 헛바람 소리를 냈다. 이 빠진 중국인 흉내를 낸 것이다. 이 노래는 곧바로 서울 장안을 휩쓸었다. 거의 모든 중국 남성이 ‘왕서방’이라는 새 별명을 얻었고, 중국인들은 어떤 멸시와 모욕을 받아도, 어떤 사기를 당해도 ‘띵호아’(頂好·너무 좋아)라고 대답해야 하는 사람처럼 되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이런 조롱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조선인들과 어울릴 때는 ‘자진해서’ 이 노래를 ‘조선인이 흉내 내는 중국인식 조선 발음’으로 불러야 했다.
1930년의 서소문동 큰길. 서소문(소의문)은 1914년 철거됐고, 길가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주변과 맞은쪽 일대에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 안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밀매음굴과 아편굴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이 동네에서 수시로 마약사범과 밀매음녀를 단속했지만, 마약 취급권을 둘러싼 중국인 폭력조직 사이의 싸움이 살인으로 번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 무렵 조선인들에게, 서소문정은 서울의 할렘이었다.
일본인, 공공연히 거론할 수 없는 ‘성역’
물론 석유 장수 ‘나카무라상’이나 광목 장수 ‘고바야시상’은 조롱은커녕 풍자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직설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조선인이 공공연히 거론할 수 없는 ‘성역’에 있었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일본인-조선인-중국인’으로 이어지는 삼분법적 서열 의식이 견고히 자리잡았다. 그 삼분법에 따르면, 일본 민족은 조선 민족보다 우월하기에 그들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적대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배워야 할 상대다. 반면 중국 민족은 조선 민족보다 저열하기에 멸시·조롱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인류 사회의 병균과 같은 존재다. 역시 당연히, 이런 의식은 민족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조선인들은 자민족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구박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환상 속에서 해결하는 버릇을 들였다. 또 한 번 당연히, 이는 일본인들이 매우 기꺼워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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