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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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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민자가 쥔 세가지 칼, 삼파도

사회불안과 마적떼 피해 조선 온 중국인 막노동꾼 ‘쿨리’
돈 모은 이들이 요리·재봉·이발 기술로 몰린데서 유래해
등록 2012-04-13 09:15 수정 2020-05-03 04:26

1904년 초,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병력과 군수품을 전장(戰場)인 만주까지 신속히 수송하려고 경부·경의철도 공사를 서둘렀다. 일본군이 주도한 속성 공사의 결과 총연장 1천여km에 달하는 남북 종관철도가 완성됐는데, 특히 경의철도는 1년 남짓의 짧은 공기(工期)와 2천여만원에 불과한 소액 공사비라는 면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토목공사의 공기와 경비는 거의 전적으로 인력 투입량과 인건비에 좌우됐다. 이 ‘불멸의 대기록’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은 철도 공사장 인근은 물론 하루 종일 걸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먼 거리에 사는 농민들까지 인부로 끌어가 총칼로 위협하며 일을 시켰다. 공사장의 일본인 감독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며 한국인 인부들을 ‘즉결 처형’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공사 기간 중 연인원 1억 명 이상의 농민이 공사장에 끌려다니느라 농사를 작파하다시피 했다.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지만, 필자는 어릴 적 기찻길 가까운 동네에 살았다. 그 탓에 초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종례 시간마다 “기차에 돌 던지지 마세요”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지는 건 아이들의 ‘생활문화’였다. 기차 승객이 밖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크게 다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 생활문화가 형성된 때는 바로 경부 경의철도가 완공된 1905~06년이었다. 경부·경의철도 침목 하나하나에는, 한국인들의 땀과 피와 한과 목숨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철도는 운행 직후부터 의병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의병들이 ‘철도운행 방해죄’로 체포돼 사형당했다. 기차는 대표적인 근대문명의 총아였으나 외세의 군사적 침략과 견고히 결합됐기에, 한국인들의 의식에는 그에 대한 적대감이 깊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끝난 뒤, 철도역 주변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과 일본인 기업의 사옥, 일본 민간인들의 주택 건축을 위한 추가적 건설 수요가 생겨났다. 이 밖에 항만과 도로 수축(修築) 사업도 활발히 벌어졌다. 이 사업들 중 일부에는 계속 한국 농민들을 동원했으나, 모든 사업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일제에 대한 한국 농민들의 분노와 적대감이 피로도에 비례해 높아갔던데다, 일제 권력으로서도 마냥 농사를 작파하게 놓아 둘 수는 없었다. 농번기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부릴 수 있는 ‘상시적 막노동자’가 더 필요했다. 중국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통감부는 1906년부터 재한 중국인 인구 통계를 작성했는데, 그해 3534명이던 중국인 수는 1907년 7739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후 매년 꾸준히 늘어나다가 1911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다시 한번 급증했다. 조선 내에 그들을 위한 일자리가 늘어난 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1906년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무렵부터 중국 전역에서 사회 불안과 혁명의 기운이 함께 고조됐다. 사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붙어다니는 ‘절친’이다. 특히 산둥성과 중국 동북부 일대에서는 ‘마적’(馬賊)이라 불린 강도단이 발호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들을 피해 상대적으로 치안 상태가 양호한 조선행을 택했는데, 그들 중에는 ‘쿨리’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 1910년대 서울의 한 건설공사 현장. 지게를 지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복장과 두발 모양으로 보아 ‘쿨리’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울 거주 중국인 중에서도 최하층민으로서 같은 중국인들에게조차 차별받았지만, 조선인들의 ‘중국인관(觀)’은 이들을 기준으로 형성됐다. 전우용 제공

» 1910년대 서울의 한 건설공사 현장. 지게를 지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복장과 두발 모양으로 보아 ‘쿨리’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울 거주 중국인 중에서도 최하층민으로서 같은 중국인들에게조차 차별받았지만, 조선인들의 ‘중국인관(觀)’은 이들을 기준으로 형성됐다. 전우용 제공

동족인 중국인들도 무시한 ‘쿨리’

쿨리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집단 채무 노예, 또는 사실상의 노예로서 아무 일에나 투입되는 중국인 또는 인도인 노동자‘를 지칭하는데, 이 말은 인도어의 ‘Kuli’(‘날품팔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를 영국인이 ‘Coolie’로 바꿔 중국인 노동자에게도 적용했고, 이것이 다시 한자 ‘고력’(苦力)으로 음역됐다. 필자의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기표와 기의의 간격을 줄인 점에서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입에 맞으니 가히 즐겁다)이라 한 것보다 더 탁월한 음역이었다. 이들은 ‘지휘자’ 또는 ‘통솔자’에게 집단으로 예속됐기에 아무리 나쁜 노동조건과 저임금이라도 거부할 수 없었다. 중국인들마저 같은 동족인 이들을 멸시했다.

중국인 쿨리들은 주로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배편으로 인천에 들어왔다. 만주 지역에서 봄에 육로로 들어왔다가 초겨울에 돌아가는 계절적 자유노동자도 많았다. 재한 중국인 사회에 본격적인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경성에 거주하는 중국인 수는 2500명 정도였는데 그중 약 반이 노동자였고, 상당한 재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상인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계층 분화는 도시 공간에도 표시를 남기기 마련이다. 중국 영사관 주변, 지금의 서울 명동과 소공동 일대에는 그래도 번듯한 중국인 집과 상점이 있었지만, 대한제국 시대 외국인 잡거지(雜居地)인 정동 이남, 현재의 서소문동 주변에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 좌우로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조선인들이 보기에도, 볼썽사나운 경관(景觀)이었다.

재한 중국인들의 직업 구성도 다양해졌다. 언제 생긴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이민자들은 ‘삼파도’(三把刀)라는 칼을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삼파도는 무슨 무협영화에나 나오는 보도(寶刀)가 아니라 채도(菜刀·식칼), 전도(剪刀·가위), 체도(剃刀·면도칼)의 세 종류 칼과 가위로서 각각 요리, 재봉, 이발 기술을 의미한다. 계절적 자유노동자로 왔다가 조금 돈을 모은 사람들은 이 업종들에서 좀더 안정적이고 수입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무역상을 하다가 일본 상인에게 밀려 망한 사람들도 이 업종들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중국인들의 또 다른 무기, ‘싸구려’

1920년대 중반 중국인들은 서울에만 200개 이상의 호떡집과 청요릿집, 100개 가까운 이발소, 수십 개의 양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파도 외에 중국인들이 가진 또 다른 무기는 ‘싸구려’였다. 그들은 심지어 덜 씻고, 덜 빨아 입고, 덜 먹기까지 하며 돈을 모았다. ‘공정가’(公正價)가 정해져 있던 이발요금조차, 이발소 주인의 ‘민족별’로 달랐다. 일본인이 주인인 이발소가 가장 비쌌고, 중국인이 주인인 이발소가 가장 쌌다. 일본식 표현으로 ‘상류’ 조선인은 일본인 이발소를 이용했고, ‘하류’ 조선인은 중국인 이발소를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자신이 일본인에게서 받은 차별과 멸시의 일부를 중국인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중국인들에는 불운이었으나, 조선인들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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