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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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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병] 온몸이 망가진 ‘0번 훈련병’

등록 2001-08-01 00:00 수정 2020-05-02 04:22

신병교육대 입소체험, 그 고행의 기록… 각개전투·20km 행군에 녹초가 되다

행군 4시간30분 만에 아침에 나섰던 신병교육대(아래 신교대) 정문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행군대열은 정문을 통과해 중대본부를 향하고 있었다. 정신은 혼미했고 발바닥은 갈가리 찢겨지는 듯했다. 10km를 걸은 뒤 두 번째 휴식시간에 완전군장과 소총을 내려놓았지만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5km쯤에서의 첫 번째 휴식 때 ‘짐’을 내려놓는 게 순리였다. 그런데 턱없이 ‘오기’를 부린 것이다. 사진을 찍던 강재훈 기자와 정훈장교는 언제라도 뒤따라오는 지프차에 오르라고 유혹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20km. 35일 동안 전투화를 신고 군기로 무장한 이들의 발걸음에 맞춰 걷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순간순간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비몽사몽간에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일주일은 신병들과 함께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던 동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왜 신병들과의 동행을 소망했던 것일까. 행군 다음날 발바닥의 상처로 어설프게 걷는 모습을 보고 누구는 그랬다. ‘자해행위’였다고.

왜 나는 ‘자해행위’를 하려고 했던가

애당초 나는 걷고 싶었다. 가능하면 인연이 없는 땅을. 가뭄에 찌들었던 봄날부터 어디든 걸어야만 여름을 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날마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걷는 것은 수월치 않으니까 몰아서 걸어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실컷 걸어가는 고행이 내게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밥값을 해야 하는 월급쟁이이면서 아침마다 네살배기 아들녀석을 어린이집에 데리고 가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떠올린 게 20대 중반 신교대에서 경험한 100km 행군이었다. 그곳에 가면 24시간 동안 그냥 걸을 수 있겠다는 치기어린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아뿔싸! 그 순간에 군대를 생각하다니, 하는 어이없음도 잠깐이었다. “그거 기자 체험으로 괜찮겠다”는 고경태 기자의 부추김에 내 귀는 한없이 얇아졌다. 어차피 ‘기자가 뛰어든 세상’에 나서야만 했다. 그렇다면 몸으로 때우는 신병체험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역시 군대는 아무나 받아들이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8년간의 예비군 소집도 지난해로 마친 ‘퇴물예비역’ 아닌가. 육군본부 정훈공보실에 신교대 체험 협조를 당부하자 담당장교는 정식 공문을 요구했다. ‘신병교육대에 단기 입소해 새로운 병영문화를 체험해 이를 널리 알리겠다’는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주말을 보내자마자 육군 백마부대 정훈장교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바랐던 것은 24시간 동안 걷는 100km 행군을 포함한 적어도 3일간의 영내 숙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병교육대를 한참 모르는 바람이었다. “100km 단독군장 행군은 없어졌습니다. 상급부대로부터 하루 일정으로 협조하라는 연락을 받아 거기에 맞춰 일정을 짰습니다.” 정훈장교가 내가 꿈꾸던 고행을 알 리 없었다. 그뒤 몇 차례 육군본부와 9사단에 연락했다. 영내에서 자는 게 어렵다면 잠은 다른 곳에서 자고 아침 구보부터 참여하겠다고 떼를 쓰듯 매달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뛰어들 수 있는 신병교육대 체험은 고작(?) 하루였다. 어쩔 수 없었다.

백마부대 신교대에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이른 아침 교통량이 많지 않은 자유로를 1시간쯤 내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12년 전, 그곳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꼬박 9일을 대기하고 야간열차로 올라와 용산역에 내려 지하철 1호선 첫차의 승객이 되어야 의정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입대 11일 만에 백마부대 신교대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훈련병들의 기상시각에 맞춰 일어난 뒤 3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신교대에서 준비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전투화, 철모, 수통 등으로 ‘간이무장’했다. 나름대로 신병의 면모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느낌이었다. “자세가 나온다”는 신병교육대 대대장의 말은 의례적인 덕담이었을 것이다. 비록 하루를 함께하는 것이지만 훈련 동료를 만난다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교장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심란했고 몸은 경직되어갔다. 나는 쫄고 있었다.

경직되었던 몸, 30분 만에 흐느적거려

얼룩무늬의 푸른 제복을 입고 신병 곁으로 가는 나. 실제상황이었다. 스물일곱달 동안 단 하루도 이곳이 나의 자리라고 여기지 못하고 틈만 나면 내뺄 궁리를 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발적’ 입소에 하루라도 더 머물기를 바라다니…. 병역기피가 판을 치는 마당에 두번씩 신병교육대를 체험하는 호기를 부리려는 것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군의 적이라는 ‘군폭력’ 현장을 살핀다거나, ‘대체복무제’ 도입의 필요성을 에둘러 느껴보려는 속셈도 없었다. 신병교육대에 ‘구타’가 있을 리 만무하고 대체복무제가 이뤄진다 해도 이제 막 군문에 들어선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무리 신병교육대 체험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해도 나는 신병으로서의 하루 일과를 거역할 수 없었다. 각개전투 교장에서 교관의 지시에 따라 몸을 굴려야 했다. 빈틈없는 교육 일정은 더이상 몸과 마음을 한가롭게 만들지도 않았다.

훈련장에서 1중대장에게 훈련 개요를 설명듣고 곧바로 각개전투 분대에 합류했다. K2 소총을 받아들고 14단계 돌격 앞으로까지 이뤄지는 각개전투의 1단계부터 시작했다. “약진 앞으로”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몸을 한 바퀴 돌리고 낮은 포복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반복훈련이 이뤄졌다. 동작이 몸에 배도록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 단계를 마치면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함께 1단계를 시작한 분대원들은 휴식시간에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얼굴에 물먹인 먹지로 위장을 해 더욱 눈동자가 또렷해 보이는 훈련병들. 그들은 페트병에 담긴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실 뿐 말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휴식군기’였다. 휴식을 취할 때도 훈련병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곤소곤 “힘들지 않냐”고 물었을 때 “견딜 만합니다”라는 간결한 대답이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마치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키냐, 는 태도였다. 신교대 입소 5주차의 신병은 군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신병들 곁에서 훈련을 받겠다고 나선 것은 오만이었다. 나의 흐트러진 모습이 그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3단계 교육을 위해 분대원들이 정렬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0번 훈련병 김수병’은 분대를 벗어났다. 멀쩡한 하늘에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듯했고, 목에서는 신물이 넘어오려고 했다. 훈련에 나선 지 30여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바랐던 고행이란 게 이렇게 왜소한 것이었나, 하는 참담함은 오래 지속되었다. 불규칙한 식생활과 줄담배, 폭음으로 인해 내 몸은 어쩌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낮이 밤으로 느껴져도 그 순간을 모면할 수는 없었다. 정훈장교는 연신 “괜찮겠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잠시 쉬며 교장에 마련된 얼음물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대열에 합류했다. 5단계 오염지대 통과까지 다시 뭉게구름이 피어 있는 시커먼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이론교육에 대한 부푼 기대는 무너지고

이날 신병들은 3일간의 종합훈련 마지막날 교육을 받고 있었다. 첫날은 주둔지에서의 화생방 훈련이었다. 화학작용제가 가득한 창고 같은 건물에 들어가 생존력을 기른 것이다. 어떤 훈련병은 40cm나 되는 콧물 줄기를 봤다는 걸 무용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지독한 경험이었겠지만 이틀이 지나니까 추억의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2일째에는 5시에 기상해 15km 완전군장 행군으로 각개전투 교장으로 이동했다. 더러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한걸음 내딛는 게 고역스럽겠지만 그것으로 훈련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200여명의 훈련병 가운데는 50여명의 ‘상근 예비역’(기본군사교육훈련 뒤 26개월 동안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향토방위 관련 분야에 복무하는 사병)도 있었지만 이미 주특기와 자대를 배정받은 현역병들은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신교대 동기이자 전우일 뿐이었다.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부대에 들어가기 전에 샌드위치 몇 조각으로 아침을 때운지라 점심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야외에서 먹는 ‘짬밥’은 땀의 양만큼 맛이 더했다. 땀을 흘린 사람에게 입맛이라는 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군기가 핏줄기와 뼈마디에 새겨진 듯한 훈련병들은 휴식시간에도 등뼈를 땅바닥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스물세살의 나이로 인해 ‘대장’으로 불리는 훈련병은 교관 조교들의 성대모사로 막간의 휴식 시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5일마다 관광비자를 받아가며 DJ생활을 했다는 훈련병은 ‘판돌이’의 12초짜리 랩으로 녹록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그때까지 나는 “역시 군대는 줄을 잘 서야 해” 하면서 오전 교육을 함께한 4소대 분대원들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오전에 14단계를 마친 그들과 함께하면 나는 오후에 그늘진 곳에 앉아서 ‘진지구축’에 관한 이론교육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오전에 시커먼 하늘도 보았으니 오후엔 좀 편히 교육을 받아야지,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오후 교육을 위해 모였을 때 나는 4소대원들 곁에 있었다. 이론교육 교장을 미리 넘겨다보며 속으로 “저 자리가 좋겠군” 하며 눈으로 자리를 찜하는 여유도 부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오전에 교관이었던 소대장이 나를 부르는 것이다. “0번 훈련병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렇게 망가진 모습을 실컷 봤으면서 다시 나를 ‘굴리려는’ 소대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나 어쩌랴 내가 선택한 훈련 아닌가. 무너진 기대에 어깨를 떨구고 오전 각개전투 다음 단계로 옮겨갔다. 14단계 돌격 앞으로, 까지의 과정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소매를 내려 팔꿈치를 보호하는 기분은 씁쓸했다. 원형 철조망 통과부터 시작됐다. 나는 분대장 임무를 맡아 “대검 장착 확인, 탄알집 장전, 수류탄 투척 준비, 던져, 약진 앞으로”라고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실제 신병 시절에는 그런 역할도 해보지 못했는데….

각개전투 교육과정에서 가장 처절했던 것은 철조망 통과였다. 바로 누운 채로 7, 8m 길이의 철조망이 낮게 깔린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다. 소총과 철모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철조망을 올려가며 어깨와 다리를 움직여야 했다. 나는 중간에 있는 통과지점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머리를 안쪽으로 넣은 뒤 자세를 취했다. 내 어깨와 다리는 쉼 없이 움직였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없었다. 마치 몸이 땅에 묶인 듯했다. 끝이 없었다. 이쯤이면 머리가 철조망을 통과했겠지, 했건만 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때 내 주변에 신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철조망을 통과해 다음 단계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얼굴 위에는 여전히 촘촘한 철조망이 버티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움직였을까. 드디어 철조망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없었다면 스스로에 대한 대견스러움에 눈물이라도 흘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도 철조망 끝은 보이지 않아

마지막 14단계 돌격 앞으로, 가 이뤄질 무렵 내 몸은 다시 흐느적거렸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3개의 타이어가 있었다. 먼저 달려가야만 그곳을 차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참을 더 가서 다른 타이어를 공격해야 한다. 첫 돌격에서 늦게 도착한 나는 다른 훈련병이 차지한 타이어 한쪽을 차지했다. 그것을 교관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당연히 원위치였다. 원위치, 라고 말하는 교관이 염라대왕으로 느껴졌다. 풀린 다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출발 명령을 듣고 힘없이 달렸다. 한참을 갔을 때 아래쪽 타이어를 차지한 훈련병이 뒤돌아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앞으로 뛰어가는 것 아닌가. 그 자리를 나에게 양보하고 자신의 남은 기력을 소진한 것이다. 민폐를 끼쳤다. 그 타이어에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글귀도 없었다. 노약자에 대한 양보라기보다는 하루 훈련병 동기에 대한 전우애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 신병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식후연초’를 즐겼다. 신병훈련 6주 동안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신병들이다. 그들에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외진 곳에서 담배를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한 배려가 될 수 없었다. “3주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 참을 것 같았는데 담배를 피운 교관이나 조교가 지나가면 돌아버리겠어요”라며 한 훈련병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 모금 빨래”라고 말하고 싶은 내 맘을 읽었는지 그는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유급이래요. 퇴소식 날만 기다리렵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다들 참는데 저라고 못참겠어요.” 듬직한 체격으로 소대 선임을 맡은 그는 입대 100일 뒤에 주어지는 ‘100일 휴가’를 하루쯤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벌써부터 기대가 남다른 눈치였다.

드디어 20km 야간 행군이 시작됐다. 출발한 뒤 산길을 내려가며 옆에서 걷는 훈련병에게 물었다. “행군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 거니”했더니, 전날 15km를 걸었던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무슨 생각을 해요?”라고 반문하면서 “이건 걷는 게 아니라 거의 뛰는 거라니까요. 앞사람 전투화 뒤꿈치만 바라볼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하는 건 채 5km도 가지 않아서였다. 황소걸음이 따로 없었다. 자리를 옮겨 만난 상근 예비역 신병은 현역에 대한 미련이 있었지만 이젠 잊었다고 했다. “훈련소 생활이 군대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웬만큼 현역 복무를 경험한 것 같아요. 스스로를 잃어버려야 견디는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모든 훈련병이 6주간의 신병교육을 통해 군대형 인간으로 탈바꿈될 수는 없었다. 그와 10여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내 입은 호흡을 돕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갈수록 몸이 풀어지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신음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내 걸을 기력이 바닥났다. 때로는 대열을 벗어나 나 홀로 걷기도 했다. 그런 내가 20km 행군을 끝내다니!

끝없이 걷고 또 걷고… 오래 기억될 고통

푸른 제복을 입고 보낸 15시간. 앞으로 이보다 긴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아무런 체력적인 준비도 없이 5주차의 훈련병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바람이었다. 신교대 훈련병은 원기왕성했다. “예, 그렇습니다”는 오래된 군대식 대신 “예”라고 짧게 대답할지라도 그들은 강인해 보였다.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던 이들이 함께 이등병 계급장을 향하고 있었다. 하루를 함께했지만 버거운 훈련을 감당하느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적어도 내 발바닥에 새겨진 지름 0.5cm에서 6cm까지의 다양한 물집 자리에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그들을 떠올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동기들만의 신교대 시절을 추억으로 떠올릴 그들, 멀지 않아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신교대 시절, 아니 군대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지 미리 궁금하다. 치열함 속에서도 넉넉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글 김수병 기자 soob@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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