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들의 고통은 내가 겪은 게 아닌데도 내 고통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린이·노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일 경우 특히 그렇다. 이때 고통은 사회적으로 확산되며 분노를 키운다. 사회적 분노는 많은 경우 대상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고통과 분노를 관용과 연대로 승화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두 나라가 있다. 미국, 그리고 노르웨이. 치명적 고통이 촉발한 분노를 다루는 두 나라의 태도는 다르다. 살펴보자.
2001년 9월11일,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본토가 사상 최초로 공격받았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상징인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워싱턴 펜타곤(국방부)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다. 3천 명이 넘는 미국민이 죽었다. 여객기가 핵이나 생화학무기처럼 대량파괴무기(WMD)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초유의 사태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책임 있는 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곤 2001년 10월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 3월20일엔 유엔 결의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부시는 세계의 모든 국가를 향해 ‘친구’와 ‘적’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부시의 미국은 ‘전쟁’이라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붙잡힌 무슬림들을 전쟁포로로 간주하지 않았다.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약도 준수하지 않았다. 일반 법정이나 군사법정이 아닌 국방장관이 최종 권한을 행사하는 ‘군사위원회’에서 심판했다. 알카에다 대원 칼리드 샤이크 모하메드는 183차례나 물고문을 당했다. 현대 인류가 도달한 정신의 표상인 국제 인권법은 ‘기회의 땅’ 아메리카에서 부시의 전쟁에 목 졸려 질식사했다. 2006년 12월30일 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사형당했고, 지난 5월2일 오사마 빈라덴이 미군에 사살됐지만,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종착역은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는 여전히 내전에 휩싸여 있고, ‘제국의 무덤’으로 불려온 아프간에서 미국은 수렁에 빠졌다. 미국은 자국의 최장기 전쟁이던 ‘베트남전쟁’(103개월)보다 더 오래 아프간에서 ‘전쟁’ 중이다. 부시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에서 흑자 재정을 넘겨받았지만, 테러와의 전쟁에 예산을 물 쓰듯 한 탓에 후임 오바마 행정부에 엄청난 재정 적자를 떠넘겼다. 지금 미국 정부는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의 벼랑에 내몰려 있다. 부시가 미국민의 증오와 복수심을 자극하며 밀어붙인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상은 더 나빠졌다.
2011년 7월22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정부청사와 우퇴위아섬에서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트가 폭탄테러와 총기난사로 76명을 살해한 대참사가 발생했다. 총리가 경호원 없이 산책할 수 있는 노벨평화상의 나라 노르웨이는 물론 세계가 슬픔과 분노의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람들의 대응은 부시의 미국과 참으로 달랐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는 7월24일 오슬로 대성당에서 열린 희생자 추도 행사에서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라고 호소했다. 파비안 스탕 오슬로 시장은 “우리는 죄인을 벌할 것입니다. 더 관대해지고, 더 관용을 베풀고, 더 민주적이 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대참사를 빌미로 시민들의 증오와 복수심을 자극하려는 어떤 정치적 수사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던 대참사를 대하는 노르웨이적 태도의 고갱이는 총리와 시장의 연설이 아닌,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우퇴위아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한 시민에게서 나왔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보세요.”
느낌이 어떠신가. 치명적 고통의 순간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드러낸 도저한 정신이 공명시킨 울렁증과 현기증을 감당하기가 힘겹다. 고통과 분노에 대응하는 ‘노르웨이적 태도’를 대한민국에 수입해 전염병처럼 퍼뜨릴 방법은 없을까.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명태균은 다리 피고름 맺혀도”…명씨 변호사, 윤석열 병원행 분개
이재명, ‘공선법’ 위헌심판제청 신청…법원 수용시 재판 정지
[단독] 검찰, 김성훈 ‘총기 사용 검토’ 내용 있는데도 영장 반려
김성훈에 반발…대통령경호처 본부장급 이상 집단 사직서
여기가 내란의 나라입니까? [그림판]
김진홍 목사 “윤석열 부탁으로 성경 넣어줘…대통령직 복귀하길”
프로야구, 내년부터 팀당 외국인 선수 4명으로 늘린다
윤석열, 군·경호처도 검사처럼 무한 복종할 줄 알았나
선관위, ‘윤석열 지지 40% 여론조사’ 이의신청 기각
[속보] “윤석열, 일체 조사 거부”…공수처, 강제구인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