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 밖에서 지속해온 몇 개의 인문학 모임은 매회 공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합집산한다. 이럭저럭 20년에 이르는 모임도 있고, 근년에 생긴 것도 있다. 어느 지역을 근거지로 삼지 않는 전국구(?) 모임인데다, 정해진 회원도 없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역과 전공과 관심에서 일매지게 하나의 갈래로 모아지지도 않는다. 그간 갖은 모임을 꾸리며 내내 흥미로웠던 사실은 회집할 때마다 마치 무슨 섭리나 음모(!)라도 있는 양 참석하는 남녀가 대개 반반씩 고르게 나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도래한 ‘여자 인문학’내가 간여했던 모임들의 경우, 그 성비가 차츰 깨지면서 한쪽의 빈 곳이 현저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5년께부터였던 듯하다. 이후론 해마다 새로 참여하는 남자가 줄거나 서서히 떨어져나갔고, 그 빈자리를 여자들이 채워나갔다. 남자와는 사뭇 다른 사회적, 상호작용적, 혹은 정서적 태도를 지닌 여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인문학 공동체는 그 제도나 문화만이 아니라 성분이나 체질 자체가 재구성되는 변화를 겪었다. 인문학의 본령을 생각한다면 성비가 과도하게 한쪽으로 쏠리는 게 불행이지만, 여자들의 전면화는 인문학적 감성과 가능성의 은폐된 지역을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를 부리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서울의 ‘수유너머’(고미숙)도 그렇지만, 부산의 경우에도 ‘백년어서원’(김수우), ‘인디고서원’(허아람), ‘연구모임a’(권명아), 그리고 ‘헤세이티’(변정희) 등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성공적인 인문학 학술 모임·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열정과 수완, 근기와 우애의 저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봄, 내가 꾸리는 모임 중 하나인 ‘시독’(時讀)의 밀양 지역 모임이 있었고, 전국 곳곳에서 찾아든 후학들이 20명 정도 있었는데, 드디어 그 20명은 모두 여자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공부 모임만으로 ‘산전수전공중전’을 모짝 겪은 나도 조금 민망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부터 ‘여자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골똘히 공글리며 인문학의 미래를 가늠했고, 변덕스러운 시세(時勢)를 붙안고라도 공부는 계속돼야 하므로, 이런 여성화 추세에 유념하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그 많던 남자가 다 어디로 갔는지, 다 어디에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궁금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변동과 추세를 엿볼 수 있는 징표라는 점에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근자 각종 시위 현장에서 여자들의 참여가 동뜨게 높아진 반면, 남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보도가 있었다. “과거와 비교해 집회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더 눈에 띄는 것일 뿐”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뱉고, “여학생들이 사회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집회에서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거나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서 기록되지 않았을 뿐 갖은 역사의 전환점에서 여성들은 꾸준히 참여해왔다”는 식으로, 구조적 사회변동 차원에서 여성들의 전면화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남자들남자들은 취업 준비를 하거나 술집에 갔다고들 한다. 한때 ‘신림동의 아이들’이 주중에는 고시 공부를 하다가 주말에는 에로비디오를 본다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준비하고 담당하는 사회적 구조 변동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떠나간 남자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 속에 온전히 들어 있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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