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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의 함정

등록 2011-07-15 19:2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년 다음해의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계, 경영계, 공익위원 각 9명씩 2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마 전 노사 양쪽 위원들이 모두 사퇴했다. 언론에서는 노사 양쪽 위원들의 사퇴로 최저임금위원회가 ‘파행’을 맞았다고 보도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최저임금위원회가 파행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게 됐다. 노사가 각각 제시하는 인상 또는 동결안에 공익위원들이 번갈아 손들어주며 절뚝거리고 걸어온 것이 최저임금위원회의 모습이었다. 중재 역할을 자임했던 공익위원들이 아무런 견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다

인권, 그중에서도 사회권과 관련해 중요한 ‘최저’ 기준이 세 가지 있다. 최저생계비, 최저임금, 최저주거기준이 그것이다. 최저생계비는 가구원 수 규모에 따라 한 가구가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정하는 것으로, 기초생활보장수급권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기준이 된다. 최저임금은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비용을 정하는 것으로, 위반 사업장을 제재하는 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최저주거기준은 가구원 수에 따라 필요한 면적과 방 개수, 화장실이나 세면시설 등의 설비 기준으로 구성된 것인데, 아직까지는 인구주택총조사의 통계 작성용 기준밖에 안 되고 있다. 인간답게 살 권리가 ‘인권’이므로, 이런 기준들이 인권의 기준인 것도 당연한데, ‘최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보니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함정 하나는, ‘최저’ 기준이 사람이 못 견디는 정도를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저 기준보다 적정 기준, 최저임금보다 생활임금을 주장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최저’ 자체에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가치판단이 포함되어야 한다. 인권의 기준이므로 최소한의 생활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기준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체 노동자의 25%에 이르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최저’의 의미는 달라져야 한다.

또 다른 함정은 최저 기준이 ‘기준’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최저주거기준은 통계청에서 미달 가구가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는 용도 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최저생계비는 기초생활보장수급권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이용 자격을 평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최저임금은 경영계가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노동계가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사이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이 기준들은 한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대한 징표다. 기준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강요받는 상황이 왜 생기고,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왜 생기는지를 묻기 위한 수단으로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최저 기준 이하로 밀려날 때 사회가 행동하기 위해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그래서 최저 기준은 우리 모두의 약속이다.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이유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인권의 기준은 인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확인하는 기준이므로 최저 기준은 늘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그런데 유독 최저임금은 노사 양쪽의 협상에만 맡겨져 있다. 최저임금이 모든 노동자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면, 언제나 임금을 덜 주고 싶어하는 사 쪽은 잠재적인 권리 침해자인데, 둘을 앉혀놓고 인권의 기준을 정하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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