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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어, 혹은 대중시대의 윤리

등록 2011-07-09 11:19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래도 리베이트를 받지 않는 의사가 받은 의사보다는 많겠지요.” 어느 방송의 뉴스 앵커가 마무리 발언으로 한 말이다. 그도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앞두고 할 말이 좀 궁했을 것이다. 복거일씨의 지적처럼, 그가 세상사를 좀더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하려 애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투어는 대중을 상대하는 그로서도 좀 곤혹스러웠을 테다. 갖은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는 소식들은 대체로 상투적인 틀과 표현에 묶여 있다. 튀고 날고 지랄(知剌)을 부려도, 그것들은 끝내 상투적으로 내려앉게 마련이다. 공급과 수요의 포맷이 대중적일 수밖에 없는, 어디까지나 ‘대중’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스의 무의미함과 일회성과 우연성에 의미를 주기 위해 이론가들에게 구원 요청을 할”(부르디외) 때조차 대중매체의 입들은 상투적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기성 체제의 보수적 외투</font></font>

술 마시고 뱉은 말이나 꿈속에서 얻은 말, 혹은 베갯머리 대화와는 달리 대중을 향하고 대사회적 가치를 의도화한 화용(話用)은 특히 상투적으로 흐르기 쉽다. 무슨무슨 아방가르드조차 꼬리가 길어지면서 상투화하지 않던가? 그래서 사회화 과정은 늘 동일한 덮개(常套) 속으로 순치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상투어의 전형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라는 말버릇 속에 그 알짬을 숨겨놓고 있다. 몰지각한 사람은 그저 우리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 상투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판단이 수많은 사회적 발언을 상투화하는 전제로서 깔려 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상투화는 기성의 체제와 질서를 수호하려는 보수적 움직임의 외투가 되기 쉽다. 그리고 기후와 풍토라는 총체적 여건이 바뀌지 않는 한 스스로 외투를 벗긴 어렵다. 실은 버릇이 된 틀(常套)은 바로 그 틀이 감춘 속살에 대한 두려움과 내통한다. 사태의 이면이나 심층을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차라리 다반사다. 대중과 대중매체의 호기심이 오락가락하는 곳도 부담스러운 진실이 숨은 곳은 아니다. 그 진실의 외곽을 습관처럼 때리면서 그 진실을 더욱 공고히 숨기는 짓이 곧 상투화인데, 이런 상투화의 대중적 형이상학이 바로 ‘그래도 리베이트를 받지 않는 의사가 받은 의사보다는 많겠지요’와 같은 식으로 언급되는 상식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만개하는 현란한 조화</font></font>

대중에 대한 지식인들의 구애는 환상적이지만,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냉소는 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거나 입신하고, 이를 통해 규제·규정당하며, 또한 대중매체를 통해 특권적 지식인층에 성공적으로 반란(反亂)해온 대중은 자신만은 결코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아니라는 오인을 시대의 양심이자 세속의 종교처럼 붙안고 있다. 가령 ‘당신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우스갯소리는 이런 총체적 허위의식의 한 단면을 최소 단위에서 잡아놓은 셈이다. 일부 몰지각한 시민만이 지하철 성추행을 일삼고, 일부 몰지각한 교수만이 표절을 일삼고, 일부 몰지각한 국민만이 신성한 병역의무를 회피하려 꾀를 부리고, 일부 몰지각한 남편만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일부 몰지각한 의사만이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상식은 소비사회의 대중이 신봉하는 마지막 윤리이자 형이상학이다. 이런 상식의 바탕 위에서, 진실로부터 자신을 수호하려는 이들이 탐닉하는 상투어는 현란한 조화(造花)처럼 만개한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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